• 왜 고난을 받으셨나? (벧전 3:17-19) [고난주간]
  • 2013.08.18 20:33:06
  • 오늘은 온 교회가 함께 지키는 종려주일이다. 
    그리고 내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고난주간이라고 하여 특별새벽기도회와 같은 행사들을 하면서 지킨다.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한 기념 행사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그리고 고난 당하신 것 가운데 어떤 것을 가장 고통스러워하셨을까?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함께 생각해 보자.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인지 함께 생각하자.

    1.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다.

    사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그냥 그대로 계셨다면 아마도 걱정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먹지 않아도, 입지 않아도 그 어떤 것 때문에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에게는 고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당하셨던 고난을 살펴보자.
    먼저,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고난을 당하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당시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를 하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행악자"라고 하였다.(요18:30)
    여기 행악자라는 말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거짓말을 하여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사기꾼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또 강도로 인정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시되 강도들 사이에서 못 박혔다.
    이것은 예수님이 강도로 인정되었다는 증거이다.(요 19:18)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 중에서도 흉악한 강도로 인정되었다.
    유월절이면 전례를 따라 총독이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죄수 하나를 놓아주곤 하였다.
    일종의 [특별 사면령]을 내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예수님을 죽이려 함에 있어 흉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선택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흉악범 바라바 보다도 예수님을 더 악한 존재로 인정을 했다는 증거이다.(마 27: 16-21)
    예수님은 이처럼 인격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고난을 당하였다.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였다(마26:67). 채찍에 맞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머리를 수건으로 뒤집어씌운 채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런 육체적이며 인격적인 고난들을 우리가 당한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끔찍한 고난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모든 고난 앞에서 그런 대로 견디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힘들어하신 고난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장장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면서 운명하시기 전에 절규를 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또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하는 것은 그래도 견딜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시는 순간, 그것만큼은 견딜 수 없으셨던지 예수님께서는 견디지 못하시고 절규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운명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구원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정도가 상상이 되는가? 
    우리 사람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고난이다. 

    2. 왜 이런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나?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상상하기조차 힘든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을까요? 
    심심하여서, 아니면 공명심에서 이런 고난을 당하였을까?
    베드로는 말한다. 
    1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된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징벌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히9:27)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한 어떤 사람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하면서 예수님께서도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한다.
    아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러면 예수님도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단 말인가?

    그런 말은 아니다. 18절을 다시 보자.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라고 베드로는 말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죄 때문에 죽기는 하셨지만 정작 예수님 당신은 의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인이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불의한 자' 곧 우리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버림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분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들은 불의한 자로서 하나님에게 영원히 버림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불의한 우리 사람들을 대신하여 버림을 받으셨다고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6)고 말씀하여서 이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의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영원토록 버림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아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대신 버림받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버림받은 이유에 대하여 계속 말하고 있다.
    18절 하반부를 보자.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버림받으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함이라고 한다.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과 사귀며 살게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면서 살지 못하였음을 전제하고 있다.
    본래 우리는 죄인이어서 하나님 앞에 서지도 못했다.  아니 설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누릴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마지못해 살아가면서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내고, 당 짓고, 음행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못이 박히며 살아가고 있다.
    17절에서 베드로는 이런 우리들의 삶을 가리켜 "악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상처를 주지도 않고 또 받지도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는가?
    이것이 불의한 우리들의 과거 모습이며, 현재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며 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고난까지 감당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놀게 하려고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였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          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던 나를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하려고 예수님은 이런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다. 
    믿는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던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놀게 하려고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감당하신 것이다.
    전에는 악을 행하므로 당연히 받을 고난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조차  버림받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신 목적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20세기 마지막 고난주일을 보내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일까? 
    고난 당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소원하셨던 대로 우리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뛰고 놀아보자. 
    아이들이 부모님 보는 앞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때 부모님들은 흡족해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뛰어 놀며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며, 하나님과 더불어 상의하면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자.
    전에는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으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며 살아가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며,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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