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길(벧전 2:21~25) [고난주간]
  • 2013.08.18 14:39:29
  •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시고 죄는 전혀 모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홀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신앙이란 것은 한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돌이킬 수 없는 법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던 사람이라도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주님 주변에는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님을 철저히 버림 받았던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오신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잘못 알고 있던 제자들은 부활 사건 뒤에야 비로소 주님께서 평소에 하시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이전에 두려움에 떨며 흩어졌던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당시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영접하는 반응과 다른 하나는 주님을 핍박했듯이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 주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는 당시 사람들에게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얻는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였던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저주의 상징이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아무도 가지 않았던 십자가 고난의 길을 주님께서 몸소 가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이 따를 수 있게 하셨고, 비로소 십자가 길은 영광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바스코 다 가마라는 항해사가 '희망봉'을 지나 멀리 인도와 중국까지 항해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희망봉'은 희망봉이 아니라 '폭풍의 봉'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한 이후에 비로소 희망의 봉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전에 전도하러 갔을 때 자신이 배운 것을 자랑하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알겠다"는 고백을 하면서부터 비로소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복음이 영접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우리들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십자가의 공로를 알지도 못하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아픔과 고난이 없이는 주님 영광이 가득한 부활 십자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사후 복음이 전해지면서 로마 사회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지배자인 로마인과 피지배자인 노예들 사이에 철저한 신분적 격차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격차가 서서히 무의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노예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혹자는 교회 안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고 우쭐대기도 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로마인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본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야 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우리 삶의 본이 되셨고,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다름아닌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본(本)'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그의 모습이 '각인'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대로 따라하는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다름아니라 늘 우리의 목표가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믿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만약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와서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하여 나중에 Marxism에 경도되었던 것이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올바로 믿는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께서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주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에 쏠렸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마저도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셋째, 우리를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시고 영혼의 목자, 수호자에게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양은 매우 고집스런 동물입니다. 목자가 양을 잘 돌봐야 독풀 뜯어 먹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병에 걸리는 것도 막아줄 수 있습니다. 때때로 털도 깎아 주어야 하고 양이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밤에는 지켜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처음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은 매우 고통스러운 길이었으나 이제 우리는 그 길을 기뻐하며 달려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걸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케 된 것은 바로 주님께서 이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길로 걸어가지 않고, 죽음의 길로도 가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길, 주님이 가셨던 바로 이 길을 매일매일 꾸준히 달려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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