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밑의 사람들(눅 23:32-56) [고난주간]
  • 2013.09.02 08:52:42
  • 교회 절기상으로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해서 이번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그를 대대적으로 환호하며 맞이하던 사람들이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쳤던 데서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유래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환호하던 무리의 소리가 몇 일 후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하는 죽음을 향한 외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생각하며 보내는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 주간을 경건하고 의미 있게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고, 우리 주님의 그 죽으심이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준 구원을 위한 죽음이었음을 가슴속에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을 우리가 그렇게 보낼 때 다음 주일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이었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된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성만찬 예식을 가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세우신 예식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다 한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커다란 빵과 포도주를 담은 부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빵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찢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빵의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이 빵은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내 몸이다, 이것을 받아먹어라'고 하십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받아먹었던 것 같습니다.  빵을 다 먹고 나자 이번에는 포도주를 담은 가죽 부대를 열더니 제자들의 잔에다 그 포도주를 가득가득 부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예수님은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 곧 약속의 피니 이것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도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한 채 그 포도주를 마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빵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의 피,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식에서 빵을 먹으며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그 몸이 채찍에 맞아 찢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하셨을까를 생각합니다.  포도주의 잔을 마실 때면 이렇게 붉은 피를 예수님이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하며 나를 위해 몸과 피를 다 바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우리도 내 모든 삶을 다해 주를 섬기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만찬 예식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성만찬 예식의 빵과 잔을 대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집에 먹을 빵이 없어서 이 작은 한 조각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마실 음료가 없어서 이 작은 포도주 한잔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신 몸에 우리가 직접 참여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흘리신 그 피 속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성만찬 예식을 통해 가르치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던 중 배반한 제자인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총독에게로 갔다가 다시 헤롯왕에게 보내지고 또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와 거기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사형이 확정되자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다한 후에 십자가에 사용할 커다란 나무를 지워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갑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예수님의 힘으로는 그것을 지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너무 무거워 쓰러질 때면 채찍과 회초리가 사정없이 내리쳐졌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군사들은 구경꾼 중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끌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못 박은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면류관이 씌워져 그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양손과 발에는 굵은 못을 박아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맨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죄명을 쓴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시간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엄숙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타는 갈증을 견디지 못해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흉악한 죄인처럼 죽어 가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셨던 하나님은 도무지 그 순간을 보실 수가 없어 태양 빛을 거두어 세 시간 동안 온 세상을 어둠으로 덮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 가실 때 바로 그 십자가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 있던 많은 사람들을 몇 개의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구경꾼들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서서 구경을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하나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빵을 얻어먹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자를 살려 주었는데 왜 자기 자신은 살릴 수 없는 것이냐고 비웃었습니다.  남을 구원하겠다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부터 구원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비방했습니다.  자신의 목숨도 보호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느냐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이런 구경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있기는 하지만 그 십자가가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는 있지만 그 죽음의 의미를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의 복락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데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구경꾼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대신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죽어야 할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구경꾼들입니다.  하지만 이 구경꾼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던 자들 중 두 번째 부류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외치던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죄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 빌라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빌라도의 명을 좇아 십자가의 형을 집행하던 군병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진리를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입니다.  가야바와 안나스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의 권세와 지위가 흔들릴까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자기들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이 두려워 예수를 죽여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 알았지만 만일 예수님을 살려두면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고 반란을 일으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습니다.  진리를 저버린 것이었고, 법과 양심을 떠난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던 군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전혀 알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명의 죄인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 그가 남긴 옷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며 죽어 가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는 예수님이 남기신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를 뽑으며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이익에만 몰두해 있었습니다.
      가야바, 안나스,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일개 이름 없는 군병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자기 이익에만 집착한 나머지 진리와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의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위해 자신들이 가진 지위와 권세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이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느냐, 내가 이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저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분이 누구인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빌라도 총독처럼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이 예수를 앎으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출세를 도모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의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빌어서 장사를 하고, 예수 이름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만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사기를 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부자가 되어 봐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나 가야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나 한 사람의 출세를 위하고, 나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어주고, 물질적인 부자를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출세하게도 하시고, 부자가 되게 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목적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가장 근본 된 목적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다른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옷을 서로 가지려고 다툼을 하던 군사들과 다름없고, 빌라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에 앞에서 그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 중 세 번째 부류는 그 죽음을 보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그 순간에 구원을 얻게 된 자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의 양옆에는 두 명의 강도가 함께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도였다는 것을 보니까 아마 살인죄를 지은 흉악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강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조롱을 합니다.  본문 39절에 보니까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라고 말씀했습니다.  강도 짓을 해서 마땅한 형벌을 받아 죽어 가는 주제에 예수님을 비방하며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구원자라면 그렇게 죽지 말고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좀 이 죽음에서 구해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그 옆에 달려 피를 흘리던 다른 한 강도가 그를 호되게 꾸짖으며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강도는 그래도 양심은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자기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절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 강도를 향하여 그게 무슨 소리냐고 질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한마디 속에 지난 날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회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그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주시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강도를 바라보십니다.  죽음의 순간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기쁨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를 향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가 비록 강도 짓을 저지른 무서운 죄인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것을 주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천국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의 지난날을 다 용서하시고 영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든지 강도였든지 도둑이었든지, 세리였든지 창기였든지 주님을 그것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로 믿고 영접하느냐 이것만 보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강도와 같은 죄인일지라도 주 앞에 나오기만 하면 주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헌신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사랑을 받은 여인들이 그 십자가 아래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을 한탄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때 공회원으로 백성의 존경을 받던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공회원은 우리 나라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고 결정할 때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죽은 다음 그 시신이라도 자신이 정중히 장사를 지내주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이 장사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에 자기가 죽으면 묻히기 위해 미리 파놓은 바위 굴 속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해 헌신된 자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신분이 공회원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시책을 따라야 출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피며 눈치껏 행동을 해야 그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의 형벌을 당한 예수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날이면 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예수님은 살아있지 않고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 일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고, 오히려 자기에게 손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죄인의 구주이심을 믿는 요셉은 그 모든 것을 다 감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때문에 어떤 곤경에 빠져도 생명의 주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이 일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 자기의 무덤을 드리는 것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신과 그 분은 전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죄인의 구주시라는 온전한 믿음에서 나온 헌신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경꾼으로 서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로 서 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도 그 십자가 밑에 꿇어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생명을 얻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그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고, 예수님이 죽으심이 곧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었음을 알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그 옆에 달려 죽은 강도의 죽음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경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경꾼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 되어야 하며 그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 믿는 것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다 포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결코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강도처럼 내가 죄인이라고 주 앞에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라고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고통을 다 당하시고 생명까지 바치셨는데 나도 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마음을 다하고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를 섬기겠습니다.' '나의 이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고백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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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1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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