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2-38) [고난주간]
  • 2013.09.02 08:53:33
  • 어느 미션스쿨(기독교학교)에서 제일 몸집이 큰 아이 하나가 작은 아이들을 몹시 괴롭히고 학대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선생님이 알고 학교에서 그 큰 아이를 추방하기 위하여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어린 학생들이 그 아이를 추방하기로 다 표를 했는데, 단지 한 어린 아이만은 예외였습니다. 물론 그 어린 아이도 몸집이 큰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못살게 굴 것을 알면서도, 그 작은 아이는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왜 너는 투표하지 않니. 네가 투표하지 않으면, 그 학생은 여기 있어도 좋다는 말인데, 그래도 좋니?" 그 어린 아이가 대답하기를 "그가 여기서 쫓겨나면 아마도 그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지 못할지 모르잖아요? 그러면 그는 계속 더 사나워질것예요"라고 대대답했습니다. 

    이에 선생님이 "그러면 너는 그 아이를 용서하니?"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당차게 대답했습니다. "예! 내가 잘못할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용서해야지요" 

    흔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미운짓을 골라하고 원수와도 같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대할 때 그들과 똑같이, 미워하고 손해를 끼치고 원수처럼 대합니다. 그래야 속이 풀어지고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높이 떠있는 태양 빛을 선한 사람에게만 비취지 않고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추어 주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려 주시되,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한결같이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는 여지없이 미워합니다. 아주 철저히, 이는 이로 값고, 눈은 눈으로 값아 버립니다. 나에게 한 만큼 나도 그들에게 똑같이 보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고, 내게 인사하는 사람에게만 인사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를 미워하고 원수와도 같은 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친히 실천하시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를 용서하시고 도리어,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우리 같으면, 나를 못살게 하고 나를 죽이려는 사람을 용서하기는커녕, 그들을 저주하고 그들이 지옥불에라도 떨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셨지만,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나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그져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극악무도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그 십자가형틀에 달리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끝까지 참으시되, 죽기까지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에 대하여 마5:38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천하에 그 누가, 이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도리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외편까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며,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도리어 기도하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이렇게 말했다 손치더라도, 친히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직!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같은 용서를 전할 수 없고, 그 용서의 말씀을 친히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들을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저희'는 당시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과, 주범인 산헤드린 공의회 대표들과 그 음모에 가담한 모든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죄 사함'과 '회개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예수님이 무엇이 부족하고 약해서, 이렇게 고개를 숙이듯이 하면서 오라고 부르시겠습니까? 그져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탕자처럼 허랑방탕한 생활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수 많은 죄인들을 지금도 "오라"고 부르십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거역하고 살아가는 패역한 자들을 향해서 "오라"고 부르십니다. 혹여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닙니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멸시와 핍박을 받으시고 십자가 형틀에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이 주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주님께로 돌아오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배은망덕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그리하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는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해 주실 것이요."(요일1: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믿고, 우리의 죄악을 돌이켜 회개하며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알지 못하면 그만큼 죄를 범하기도 쉽습니다. 또 무지한 사람은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신다'(롬8:26)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의 무지함을 그져 수용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선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도 다를 바 없다"(시49:20)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와 명예를 소유했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도 다를 바 없습니다. 마음이 둔하고 영적인 귀가 막히고 영적인 눈이 감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가 분명히 알고 믿고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권세를 얻었습니다(요1:10-12).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분명히 알고 바로 알고 믿을 때 축복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대의 설교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스펄젼 목사님은 "무지는 무죄가 아니라 유죄"라고 말했습니다. 즉, 알지 못하는 것도 죄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없고, 그로 인해 구원의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 예수님이 세상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을 구원하실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중에 오셨지만, 그 백성들은 그를 영접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유죄입니다. 몰랐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노신사가 어느 날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늘 하던 대로 어느 지점에 이르러 좌회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일 사이부터 그곳에 '좌회전이 금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교통순경이 와서 법을 어겼다고 말했습니다. 그 신사는 "미안하지만 저는 몰랐습니다"라고 답변하자, 그 순경이 말하기를, "선생님, 법을 어기는 것과 모르는 것은 똑같이 처벌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법을 어기는 것만 죄가 아니라, 모르고 행하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이 용서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해서, 그들이 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인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그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들이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 분이 나의 '구세주' 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구원얻은 성도답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십자가는, 진정한 승리는 용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정복할 때는,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때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열두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로마 군인들을 다 죽여버리고 십자가에서 보란 듯이 뛰어 내려오셨다면 사탄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고 복수했더라면, 완전 패배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기 위해 오셨는데, 만약 십자가를 거부하셨더라면, 죄인들에게는 영영 희망이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탄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복수나 저주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경제가 아직도 성장의 속도가 느리고, 요즘에는 더욱 더 침체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서민들을 위해서 계속적인 지원과,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을 끝까지 고수하겠다고 다시 한 번 밝혔습니다. 햇볕 정책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와 사랑의 마음입니다. 

    차가운 바람과 구름으로는 단단히 조여 맨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수 없지만, 뜨거운 햇볕으로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해볕 정책입니다. 좀 경제가 힘들고 침체되었더라도 끝까지 대북지원을 하는 것은, 결국 남북한은 한 민족임을 자각하게 하여 평화통일의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려는 대통령의 의지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힘든데 남 도와줄 것이 어디있느냐는 식으로 북한에게 주었던 식량 공급을 차단하고 경제적 도움을 중단한다면, 결국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될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하는데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욥이 무서운 시험을 이긴 것도, 자기를 괴롭히는 아내와 친구들을 욕하지 않고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은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싶은대로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이웃이 내게 잘못할 때는 몇 번까지 용서를 하오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숫자적으로 490번 용서하라기보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처자식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어서 용서해 달라고 빌 때 주인이 용서해 주었더니, 그 사람이 나가다가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더니 애원해도 용서해 주지 않고 멱살을 잡고 끌어다가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10억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100만원 빚진 자를 용서해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태복음 18:35절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고 나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용서를 받고, 다른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면 반쪽 성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울이 변하여 대 사도 바울이 된 것은, 다메섹도상에서 거꾸러지기 전에 스데반이 순교할 때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이빨이 다 부러지고 갈비뼈가 다 부러지면서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이 천사와 같이 된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때 바울은, 충격을 받고 거꾸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이, 사울을 바울되게 한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합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듭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니다. 진정한 승리는 용서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같은 십자가의 용서가, 죄악으로 얽룩진 세상을 덮었고,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통하여, 먼저 우리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허물과 죄악을 깨닫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마음깊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는 자가 참으로 복받은 자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승리는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형제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사랑과 용서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이웃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귀한 축복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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