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상칠언(눅23:39-46) [고난주간]
  • 2013.09.02 08:58:34
  • 다음 주일은 교회가 다 같이 부활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언제나 그래야 하겠지만 이 한 주간은 특별히 예수님의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147장 찬송가는 아이작 왓츠라는 믿음의 사람이 지은 시입니다. 그 찬송의 가사 같이,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릴 수 있습니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줄 알 때에 우리에게 있는 교만한 마음을 다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신 주님의 손과 발이 보이십니까?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 영광의 면류관을 내려놓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저주와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받은 은혜는 온 세상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주를 위하여 몸으로 제물 삼아드리는 삶을 결단해야합니다.  

    오늘은 고난과 능욕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모진 우주적인 고난을 받으시면서 십자가 상에서 뱉으신 일곱마디의 말씀, 가상칠언의 말씀으로 주님의 받으신 고난의 큰 뜻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잔혹한 십자가를 지셨는데, 이는 성경에 이미 예언했던 대로, 시편에서 말씀한 대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그 십자가의 고난에 비교될 만한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셨습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서 죄를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로마 군병에게 예수님을 못을 박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27: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온 군대를 예수님 있는 곳으로 모읍니다.
    우리 주님을 유대인으로 왕이라고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입으신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힙니다. 홍포를 입힌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뜻입니다. 또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웁니다. 

    서현교회 허집사님이라는 분은 우리 교회에도 꽃꽂이를 종종 봉사해 주시는 분이신데, 고난 주간 꽃꽂이를 하다가 가시에 찔렀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더런 놈들이 이 가시로 예수님께 씌웠다니..." 그 더런놈이 바로 저와 여러분임을 아십니까?

    왕이 드는 금홀 대신에 갈대를 주님 오른 손에 들게 합니다.
    그 앞에서 그들이 마치 자기 황제에게 하듯이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놀립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얼굴에 침 뱉음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 주님의 얼굴에,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얼굴에 그들이 침과 가래를 뱉았습니다. 그러고는 예수님께서 들고 계시던 갈대를 다시 빼앗아서 예수님의 머리를 칩니다.
    희롱을 다 한 후에 입혔던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입었던 옷을 입힙니다.
    이제 그들은 그 부끄럽고 무거운 십자가를 연약한 주님의 어깨에 지게하고는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쓰러지시자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지게 했습니다. 골고다에 이르러서 진통을 멎게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렸으나,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저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양 손과 양 발에 못을 박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를 뽑아 나눕니다.
    그 때에 예수님 좌편과 우편에 두 강도가 못을 박혔습니다. 아무 흠이나 죄 없으신 주님께서 강도와 같은 대우를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성전을 사흘만에 헐고 짓는 자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남을 구원한다고 하느냐?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남은 구원 하였으되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놀립니다.
    함께 못 박힌 강도조차 같이 놀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전 9시에 못 박혀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오후 3시에 운명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입니다.
    이 모든 능욕과 고난과 희생이 다 죄로 인하여 영원한 죽음 가운데 있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을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고, 구원얻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달리시고 마지막에 운명하실 때 까지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를 "가상 칠언"이라 하는데 이 예수님의 가상칠언의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역사가 무엇을 위함인지 그 고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것입니다. 이 가상칠언의 말씀을 새기면서 우리들도 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첫 마디 말씀이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역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은 그토록 멸시 조롱하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 유대총독 빌라도의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고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구를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원수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끝절의 말씀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극치였습니다. 자기를 치고 찌르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사 그들이 용서함 받도록 기도했습니다. 
    이 십자가 지심이 바로 사죄의 용서를 위함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신 주님께서 원수인 우리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도 그리스도께서 원수까지 사랑하신 것을 본 받아서 서로 사랑하여야할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두번째로 하신 말씀은 누가복음 23:42-43에서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주님을 함께 욕하던 오른 쪽에 달린 강도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서 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 회개한 강도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 아무 상관없는 일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생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강도와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강도들도 처음에는 예수님도 자신들과 같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른 편의 강도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옆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심을 압니다. 예수여? 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예수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생들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금 자기 옆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강도는 예수님의 지금 십자가 지심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임을 그 시로 깨달아서 회개를 하고는 자기를 구원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 때에 그는 그 시로 낙원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강도는 비록 지은 죄로 십자가를 졌고, 죽었지만, 그는 영원한 영생을 약속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누구를 가르칩니까?
    이 강도는 바로 나 아닙니까? 나는 강도 짓은 안했다 하십니까? 자신이 지은 죄가 강도가 지은 죄 보다 더 크고 더러운 죄라는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다 강도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라도 같지 않습니다. 한 강도는 회개해서 구원을 얻었고, 한 강도는 회개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 다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는 인생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인생이 다 죄인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죄인은 다릅니다.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나는 십자가의 좌 우편의 강도와는 상관없다고 여기십니까? 
    우리들은 우리들이 지은 죄로 다 영원한 사망에 들어갈 자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강도와 같이 여김을 받은 것은 강도의 죄를 범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편강도는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강도와 같이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믿지 못하신 분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강도와 같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강도와 같이 달려서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는 왕을 위해서 죽는 죽음은 있기도 하고, 나라를 위해서 순국하는 그런 죽음은 있지만, 의인이 그것도 지극히 높은 왕이 죄인을 위해서 원수를 위해서 대신 죽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하신 일입니다.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느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고, 그 고난받으신 의미를 깨달아 아는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들도 죄인과 원수를 부르시는 주님의 심정을 알아서 죄인 구원하는 일에 힘을 써야할 것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우주적인 고난 가운데 계신 주님께서 세번째로 하신 말씀은 요 19:26-27: "십자가에 가까이 까지 와 있는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하여 하시는 말씀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십자가에서 이루시는 우주적이고 영원한 구원 사역과 비교할 때에 조금은 사소하고 무시할만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중요함을 아시고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의 윤리를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에도 그 찢어지는 가슴으로 바라보는 육신의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까지 따라와서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면 안됩니다. 결코 기독교는 비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우리 주님께서 그 십자가 상에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부양할 제자를 찾았습니다. 
    이전에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면 부친 장사도 가족 작별도 뒤로하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교훈은 인간의 윤리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좇는 일에 이런 인간윤리의 의무가 장애물이 된다면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일은 절대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주님 따르는 일을 우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고, 이 세상을 살면서 지켜야할 윤리에 대하여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부모와 형제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그들을 미워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고 백배나 더 좋은 것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그들을 구원하는 진정 그들을 사랑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윤리의 종교는 아니지만 윤리를 무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윤리를 초월했다는 것은 신앙안에는 윤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고 하면서 인간의 도덕면을 무시하기 쉬운데 그러면 이 아가페적인 사랑, 구원의 사랑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위대한 십자가 사역 가운데서도 당신이 하실 일을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중에 넷째 마디의 말씀이 본문에 마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셨습니다.
    이 말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원망 불평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에 있는 말씀대로 인데, 이 외치심, 부르짖음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이 귀한 구원의 역사에 제물로 쓰십니까?"하는 감사와 감격에 넘친 외치심입니다. "어찌하여" 라는 말은 원망조가 아니고, "나를 버리심으로 구원의 일을 하게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지 않으셨으면 십자가를 지시지 못합니다. 누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죽이심, 다시말하면 버리심이 구속의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그 고난의 효력이 얼마나 영광되며,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는 이 가치 있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고, 대속이 되게 하심을 찬송,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십자가 지신 것이 억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유월절 마시기를 원하고 원했다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집사로서 첫 순교한 스데반만해도 무리들이 돌을 들어서 치는 그 순교의 현장에서도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어서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주님의 제자들도 주로 인하여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하물며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원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주께 쓰임 받는 것이 은혜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겠다면 나를 희생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감사하시는 신앙되기 바랍니다. 주로 인한 고난, 기뻐하십시요. 감사드리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믿음을 가집시다.

      다섯 째 말씀이 요19:28에 있는 말씀으로 "내가 목마르다"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셨으나 고난을 당하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겠는가? 아닙니다. 주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인성을 부정해버리면 십자가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참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같이 당하신 분입니다. 히4:15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하였습니다.
    다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다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목말라 했습니다. 이는 또한 이 십자가의 대속역사를 이루는 데에 대하여 목마르듯이 안타까와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 목마름이 있습니까?

     여섯 째로 하신 말씀이 요 19:30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완전히 이루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8절에서 목마르신 예수님께서 이제 다 이루었다고 만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갈증을 느낀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지 못할까 함으로 심한 갈증을 느꼈고, 이제 목마름이 없어진 것은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공생애를 하실 때에 사마리아 앞에 계신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신 후에는 제자들이 잡수실 것을 드렸으나, 드시지 않고 하신 말씀이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룬 것입니다. 완전 순종입니다. 또한 대속의 구속 역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완전 대속입니다.
    예언하신 성경을 다 이루셨습니다. 율법의 그 엄한 요구를 다 이루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완전 대행입니다.

      일곱 째로 하신 말씀이 눅 23:46:"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셨습니다.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께 완전 순종하시고, 완전 대속역사를 이루시고, 율법의 지성지공의 요구를 고난과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이제 아버지께서 이를 인정하시고, 승인하시기를 원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제물로 받아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인생의 질고를 다 담당하시고, 슬픔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그 분이 약하고 못나고 피할 지혜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인함입니다.
    나를 인함입니다.
    내 죄를 인함입니다.
    내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유대 병정, 로마병정이 아닙니다.
    나와 여러분의 죄악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과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신 십자가 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히신 손 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첫째로, 이렇게 원하고 원하셔서 십자가 지시고, 완전히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임을 믿어야합니다. 믿을 때에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용서함 받았음을 믿읍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본받아 우리들도 원수라도 끝까지 사랑합시다. 
    셋째로,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강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신 것 같이 우리들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합시다.
    넷째로,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합시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목마름을 느끼시듯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심한 갈증을 가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전부를 다 기울여 순종하신 것 같이 우리들도 모든 것을 다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으로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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