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과 지옥의 차이(눅 23:32~43) [고난주간]
  • 2013.09.02 08:54:19
  • {해골}이라고 불리워지는 곳,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좌우에는 두 행악자들의 십자가가 나란히 세워졌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패가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습니다.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인의 부수입'이라는 당시의 관습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공개처형이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과 그 부근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 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 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27:42-43)고 희롱을 하였습니다. 로마의 군병들도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희롱을 합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까지 합세하여 예수님을 욕하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전 우주가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과 비방을 퍼붓고 있는 것같은 장면입니다. 참으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굴욕의 장면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아니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신 분이 수치스러운 모욕의 십자 가를 묵묵히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한 마음이 되어서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쪽에 있는 강도의 마음에 조용하지만 빠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 옆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가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조롱하기 위하여 새겨진 팻말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표어가 나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한 나사렛 사람이 아니요, 단순한 성자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 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흉악한 나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기 위하여 내 대신 십자가 를 지고 가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동료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욕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었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했던 그 입술로 이제는 예수님의 무죄를 변호할 뿐 만 아니라 자기의 죄인됨을 인정하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비방과 욕설에도 침묵하고 계시던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영혼의 구원 을 호소하는 소리를 듣고 드디어 입을 여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렐루야! 자기가 몹쓸 죄인이라고 깨닫고 나는 죽어도 마땅하지만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죽으셔 야만 하는가라는 심정으로 회개하였을 때에 구원의 은총이 즉시 임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이 두 강도의 차이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한 평생 함께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뒹굴어 오던 저들이 어찌하여 한 순간에 이제는 영원 히 함께 할 수 없는 길로 갈라서게 되었습니까? 
    범죄함에 있어서 항상 뜻이 합치되었던 그 우정이 한 순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갈림길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었습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았습니까?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데 우편 강도에게 나타난 십자가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고 있습니까? Bbr>지금까지 골고다 언덕에 달려서 피를 흘시고 살을 찢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 떻게 바라보았습니까? 
    그 십자가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예수의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특별히 이 한 주간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큰 은혜와 감사의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 다.

    I. 본문 40,41절봅시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 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강도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변 화였습니다. 구원 받은 영혼들에게 바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한 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한 강도의 비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고서 라도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무서운 것이 없이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한 강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 하나님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평생 두려움이 없이 살아온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전 12:13)이라고 하였는데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만날 때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는 죄인임 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분 앞에 모든 죄를 자 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는 "아, 재수없다, 왜 하필이면 그 때 체포되어서 이 모양 이 꼴인가"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자기의 죄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임을 깨달았을 때에 나 같은 것은 이렇게 십자가에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오직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나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의 살아온 모든 삶으로 미루어 보건대 저는 타오 르는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천번 만번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복음이며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 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에 대한 깊은 발견이 없이는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의 필요성을 느끼고 예수님의 구원의 손 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수의 구원을 요청하는 강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강도처럼 "내가 받아야 할 이 처형은 마땅하다, 그래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다"라고 자기를 발견했을 때 바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 흉악한 강도가 이러한 체험을 하였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 가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강도처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예수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예수의 속죄가 아니고서는 내 죄를 사함 받을 길이 없습 니다.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주님 의 놀라운 사랑과 속죄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자신을 철저히 낮추십시오, 자기를 부인하시고 십자가 앞에서 항복하십시다. 피곤하십니까? 병들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주님이 어루만져 주십니다. 싸매어 주십니다. 치료하여 주십니다. 능력의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벅찬 기대와 감격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회개한 강도의 신앙고백에 나타난 주님의 은혜를 살펴 보십시다 
    회개한 강도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 을 바라보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발견이며 멋있는 신앙고백입니까? 그는 다른 강도처럼 현세에서 더 살기 위하여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감히 살려 달라고도, 감히 구원하여 달라고도 하지 못하고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르짖 었습니다. 그는 다른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이름이 하나님 앞에 기록되기 를 원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즉각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39절의 말씀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야 유 섞인 비방을 함에도 불구하고 잠잠히 계셨던 주님! 야유와 멸시와 천대의 현장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주님께서 회개하는 강도를 향하여 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옳습니다. 회개하자마자 주님은 강도에게 얼굴을 향하였습니다. 회개하자마자 주님은 나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회개하자마자 성령은 내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회개하자마자 내 삶속에 변화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오늘의 축복을 보장받는 기쁨과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주어진 오늘의 축복 속에서 미래를 보장받는 은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억합시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이야말로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이고 오늘이라고 일컫 는 이날이야말로 영원을 향하여 살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입니다. "오늘"이라고 알컫는 동안에 우리들은 예수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순간의 삶으로 마감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을 향하여 살 것인가?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에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을 위해 쌓아 두며 살 것인가? 양단간에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만이 우리의 날입니다. 오늘 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날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축복이냐? 저주냐? 이 모든 갈림길이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에 결정됩니다. 히브리 기자의 권면을 들어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내일 가봐야 있습니다. 주어진 오늘의 시간을 아낍시다. 오늘 전도합시다. 오늘 기도합시다. 오늘 주의 일을 합시다. 오늘 주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내일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습니까? 마귀의 "차차수법"에 걸려들지 마세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미루지 마시고 오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어가시면서도 죽어가는 한 영혼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보여 주 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 속에서도 아무런 가치 없는 한 강도를 구원하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실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구 령의 열정을 가지셨습니다. 
    정말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죽어가는 영 혼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육체의 모든 힘을 쏟으신 것처 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갑시다.

    우리의 몸에 피가 식고, 우리의 코에 호흡이 끊어지고, 우리의 입의 혀가 굳어질 때까지 십자가에 피 묻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자랑이 되게 하십시다. 회개한 강도는 용서는 받았지만 용서하여 주신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 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고 주님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시간과 재능이 있지 않습니까? 두 강도가 출발은 같이 했지만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두 여인이 맷돌을 가는데 한 여인은 들림을 받고 한 여인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들림을 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간격으로 떼어 놓았습니까? 회개와 믿음이 이 두 사람을 갈라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 장차 누릴 즐거운 낙원의 축복을 생각하시면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믿음으 로 바라보고 끝까지 따라가셔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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