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산 자의 복(고전15:12~19)
  • 조회 수: 562, 2013.07.08 22:17:56
  •  오늘은 주님께서 불의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대혁명적인 사건으로,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요,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 귀한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무덤 가운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새벽에 천사의 말로 증언되었고,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증언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복이며 은혜입니다.

     

    첫째, 사람에게 찾아오는 죽음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지 사흘째 되던 새벽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걱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무덤 입구를 막고있는 큰 돌을 누가 굴려 줄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파수하고 있던 무덤을 찾아가서 보니 군인들은 하나도 안보이고 돌은 벌써 굴려져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서 흰옷입은 천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나사렛 예수를 찾느냐?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예수님을 장사했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덤 앞에서 인간의 생명을 삼켜버린 허무와 절망 가운데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죽음의 돌문을 열어줄까'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종착역은 무덤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무덤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 길인 것입니다. 성공자나 실패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죽은 자요 죽음을 향하여 가는 자입니다. 무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명예도, 영화도, 모든 부요도 무덤이 다 삼켜 버립니다. 무덤에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덤은 인간 최대의 절망이며 어둠이고 종착점입니다.

        이 인간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자는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무덤문을 열고 죽음을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주

        어떤 흑인 목사의 예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마리의 큰 뱀이 바다 속을 헤엄치다가 많은 고기들을 삼켰습니다. 삼켜진 고기 중에는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가진 물고기도 있었답니다. 결국은 그 고기의 날카로운 지느러미 때문에 큰 뱀의 배가 갈라졌고 덕분에 삼킨 바 되었던 많은 물고기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예수님까지 삼켰으나 예수님은 사망에 묶여있지 않으시고 무덤문을 열고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죄 값을 치른 후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가 무너지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찾아오신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만이 해결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산 자는 복된 자요 죽은 자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오는 모든 슬픔, 눈물, 허무, 절망은 죽음에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어도 죽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죽음으로 향하기에 불쌍합니다. 괴테는 " 이 세상에서 부활의 소망이 없는 자는 화려한 나그네요 불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주와 불행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집에 살고, 어떤 위치에 있었고, 무슨 학위를 받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산 자냐 죽은 자냐가 중요합니다.

        죽은 자들이 호화로이 살았던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예수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불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불쌍하지 않으며 병들어도 세상에서 천대받아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소망이 있기에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는 자를 불쌍한 존재로 봅니다. 부활 소망이 없는 헛된 믿음을 가진 자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최고 가치는 사는 것이요 최고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행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다시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산자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하면서 자기는 여전히 죽은 자로 탄식하며 허무한 것에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죽어야만 천국에 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죽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는 산 자들입니다. 우리는 산 자들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에는 죽은 자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산 자만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누가 살아나는 것입니까? 산 자로 잠자는 자들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의 출발이며 예수 생명으로서 새로운 존재, 하나님의 아들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습니다.

     

    셋째, 주 안에서 다시 산 자는 그 삶이 변화된 자이며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주 안에서 다시 산 자는 삶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예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인간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게 하심이라(롬 14:7~9)"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구원이 약속되었으며 우리의 사는 목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자는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가 다릅니다. 죽은 자의 살 대상은 죽어야 할 자기 뿐이지만 예수 안에서 산 자는 자기를 살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크리스챤의 행복이 있고 삶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나는 날마다 죽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제 우리 산 자들은 죽은 자들과 가는 길이 다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먹는 양식이 다릅니다. 성도의 양식은 썩지않는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땅만 바라보며 살던 인간들에게 허물을 벗게하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먹으며 찬송하며 사는 하늘의 시민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세상에 있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줄 압니다. 이 삶이 변화된 삶입니다. 가치관이 변하고 관점이 다릅니다. 듣는게 다릅니다. 내 중심, 세상 중심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으로 살게 하십니다.

     

    넷째, 주님 안에서 다시 거듭난 자 산 자의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소유하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며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풍성한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요6:51)"고 했습니다. 이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자들로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산 자의 행복과 죽은 자의 행복이 다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죽은 자에게 좋은 옷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명예, 훈장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부질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 사람처럼 살면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살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크리스챤입니다. 이제 성도는 다시 산 자이기에 먹는 양식이 다르며 입는 옷이 다르고 만족할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외양간에서 여물을 먹는 소는 산에서 고기를 잡아먹는 사자의 밥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나사로의 행복과 부자의 행복이 다릅니다. 나사로는 부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는 목적도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산 자의 복을 누리는 자였고 부자는 죽은 자였기에 나사로보다 불쌍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참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될 때에 산 자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 자의 신앙으로 사는 자는 살아도 행복하고 죽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두 산 자로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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