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다시 사셨다(고전 15:12-28)
  • 조회 수: 682, 2013.11.03 21:21:56
  •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날입니다. 사실 이 날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는 이 땅위에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 날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헤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부활의 권능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이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신 사실을 보여 주신 날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는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가 흔히 ‘부활의 장’이라고 이름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고난 주간에 된 일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모든 사람이 나아와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예수를 적대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그리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반역자 유다의 협력을 얻어서 예수를 체포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까지 압력을 가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마음을 조작해서 말하자면 데모를 일으키게 해서 예수님을 ‘호산나 호산나’하며 환영하던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소리 지르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빌라도로 하여금 본의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연약하신 몸에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게 될 때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마음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의 다른 형벌이 있다면 그것을 지우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제야 우리가 생각한 대로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가슴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될 때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볼 때 저들은 조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원수들은 개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우리가 이겼다”며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마치 앓던 이를 뽑은 것만큼이나 시원해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불의가 이렇게 정의에게 승리했습니다. 선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악은 개가를 불렀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리가 거짓 앞에 맥을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과는 정반대로 환멸과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모두가 상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현상은 오래 갈 수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어두움의 세력이 오래 지배할 수 있습니까? 아내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움을 헤치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상심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픔 가운데 눈물 흘리며 한편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예수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먼저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도마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고 말할 때 “나는 내가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손을 만져 보고 그 옆구리에 창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일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번만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마도 다음 기회에 다시 사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야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일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사신 일은 과학의 세계를 초월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다시 사신 일에 대하여 여러 말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사건이 얼마나 놀랍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여기 말씀하신 성전은 물론 예수님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 삼일만에 다시 사신다는 뜻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너희에게 다른 것을 보일 것이 없다.

    여러분이 구약 성경의 요나서를 읽어보시면 요나 선지자가 깊은 바닷속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처럼 예수님도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다는 의미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명을 버릴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베드로가 선뜻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 후에 주님께서 어떻게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장들에게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하신 말씀은 “사흘 만에 다시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변모하여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내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기 전에는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는 “내가 다시 살아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친히 예수님께 말씀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 주일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그 부활의 권능이 나타난 날입니다.

    참된 빛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참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미움을 몰아내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으로 이 세상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그야말로 상심되고 환멸에 빠지고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갈릴리 바다로 고기잡이나 해보려고 맥없이 돌아가서 그물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서리어 있었고 그 어깨는 늘어지고 그들의 발걸음에는 맥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빛을 잃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구원할 줄 알았었는데...” 이런 탄식을 하면서 그들의 이상이었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짐작이지만 아마 한적한 곳으로 피하여 가서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로 인해서 환멸과 실망, 나약과 비겁에 사로잡히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심으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아주 변했습니다. 슬퍼하던 제자들이 기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새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몸 하나 가누기 어려워하던 제자들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난 후 승리감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것 뿐이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겁해졌던 제자들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새로운 용기와 담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사람의 조작으로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 예수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곳곳에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어두움이 빛을 몰아내 밤 같이 캄캄한 세상으로 만드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어떻게 이렇게 까지 될 수 있을까? 의심할 수 있을 정도의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을 봅니다. 의의 편에 서서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잃고 불의한 사람들의 눈치만 보며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맥이 없어졌습니다.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의욕도 없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기 몸이나 다치지 않으려고 이리 피하고 저리 숨어 버립니다. 모두를 체념해 버리고 만 사람이 많습니다. 의식주만 해결되면 아무 상관없다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다는 생활 철학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의를 위해 살아보겠다고 하고 진리 따라 걸어가겠다고 하고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의식이 있는 사람에겐 정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런 세상이 계속될까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이런 현상이 절대로 오래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정의가 불의에게 눌림을 당하고, 양심의 소리가 권력에게 무시를 당하고, 진리가 거짓에게 희롱을 받으며, 자유가 독재에게 설 자리를 잃어버린 이 세상, 이 어두운 밤이 언제까지나 계속 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어두움의 권세를 몰아냈습니다. 불의의 세력을, 미움의 힘을, 거짓의 세계를, 악의 무리를 몰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사신 후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다시 사심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다시 살 것을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예수님이 무덤을 헤치고 다시 사신 것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 절망이 둘러싼다고 하여도 겁내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우리가 이 보배(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다시 사신 것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어떤 형벌이나 처지에서도 담대합니다. 어떻게 그처럼 비겁하고 나약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 더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사실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 같은 제자는 공갈치며 제지하는 공회 앞에서 “내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나는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그에게 어디서 이와 같은 담력이 생겼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직접 본 사람은 증인으로 힘이 있습니다. 들은 것과 본 것은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다시 사신 주님 안에 있으면 나도 주님처럼 다시 산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 사람, 세상의 권력이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님처럼 돌로 자기를 치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것입니다. 어떻게요?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지난 삼일 기도회 때 생각한 욥기 19장에 욥의 간증을 보세요.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하나님께 간구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첩경에 흑암을 두어 앞이 캄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소망을 나무 뽑듯이 뽑으시고 그를 향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원수를 대하듯 하시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육신으로도 고통이요 마음으로도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형제들도 그를 멀리하며, 아는 사람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고, 친척은 그를 버리고 친구는 그를 잊었습니다. 종을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아니합니다. 그의 아내가 그의 숨을 싫어합니다. 어린 아이들도 업신여기고 조롱합니다. 피골이 상접해서 욥은 그의 친구를 부르며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소리 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때 욥은 세상을 보던 눈에서 돌이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늘에 구속자가 살아계심을 보았습니다. “내가 알기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외쳤습니다. 주님을 이 눈으로 뵈울 때 확신이 생기고 이와 같은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담력 그리고 인내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8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는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

    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다시 사신 것과 내가 어떤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구주로 영접했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사셔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는데 주 안에 사는 내가 다음 열매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나와 상관 없는 예수님의 부활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믿는 사람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담대하게 예수임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말과 생활로 “예수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증거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찬송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 사람들에게 절망과 공포와 좌절에 사로잡혀 있는 내 겨레에게 “예수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알리십시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두운 환경 가운데 처했다고 해도 우리는 낙심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두려워 하거나 겁내지 맙시다. 부활의 아침이 다가 옵니다. 언제나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27년전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독재에 항거하여 자유를 찾은 4.19 기념일입니다. 그때 이승만 박사는 자리를 물러나며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항거할 줄 아는 젊은이가 있는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꽃 같은 젊은이들의 흘린 피는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저희의 피는 계속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뜻깊은 부활 주일 아침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온 우리 민족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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