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21:01-14/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
  • 조회 수: 469, 2013.11.09 20:54:12
  •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심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사실 이 날이 없었다면 이 땅위에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 날은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헤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부활의 권능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이 우주와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게 될 때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어른들은 입었던 겉옷을 벗어 지나가시는 예수님 앞에 깔아 카펫을 대신했습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적대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반역자 가룟 유다의 협력을 얻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공회에서는 불의한 재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위협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마음을 조작해서, 말하자면 데모를 일으켜서 결국 빌라도로 하여금 본의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치욕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가시게 되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이 조작해서 죄를 뒤집어 씌워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셨습니다. 무지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양손과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원수들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우리의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가슴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는 희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저가 남은 구원했지만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먼.” 비웃고 침 뱉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멸시와 천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원수들은 개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우리가 이겼다”고 하면서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승리감에 차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가 정의를 눌러 버렸습니다. 선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악이 개가를 불렀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삼켜 버렸습니다. 진리가 거짓에게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들과는 정반대로 환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모두가 허탈해 했습니다. 상심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후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는지 알 수 없어서 다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현상이 오래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을 어두움의 세력, 불의의 세력이 오래 지배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치고, 죽음의 장막을 헤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상심하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픔 가운데서 눈물 흘리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악한 세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일은 2천년 전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현상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공산주의 사상의 먹구름이 북한 땅을 온통 뒤덮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형식상 교회가 한두 개 있다고 하지만 전시용이고,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어 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오래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 어두움을 헤치고 다시 일어나게 될 때가 멀지 않은 것을 믿습니다. 
    북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과거 수십 년간 군사 독재 밑에서 얼마나 불의가 자행되고 있었습니까? 중상과 모략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람을 죽이고 인격을 모독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해 왔습니까? 언제 이 어두움의 권세가 물러날 것입니까? 군사 독재의 세력을 물러가게 하신 하나님이 아직도 덜 걷혀 있는 먹구름을 완전히 몰아낼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기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본래가 이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바다에 대해서는 퍽 익숙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3년씩이나 다니느라고 손에서 그물을 놓긴 했었지만 그래도 몸에 밴 기술이라고는 역시 고기 잡는 일뿐이었습니다. 
    제자들 중 맏형 격인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다른 제자들 중 여섯이 함께 따라나서 일곱 명의 제자는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놓았던 그물을 다시 잡았습니다. 몸에 밴 기술이니까 그물을 사용하는 데는 문제될 것이 별로 없는데 고기가 있을 만한 데를 골라 가며 그물질을 해보아도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밤이 새도록 애썼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성경학자 플루머는 “처음의 실패는 그리스도의 어부들의 공통 운명이다. 실패를 다시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때마다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맡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이 꼭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의 방향을 가리켜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친절한 어른이 언덕에서 바다에 밀려오는 고기떼를 보고 일러주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의식중에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밤새 던져도 한 마리 잡히지 않던 그물에 큰 고기가 가득하게 잡혔습니다. 

    영적으로 생각하면 신령한 어부인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영혼을 얻는 유일의 비결임을 배우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찾아 오셨는데 누가 먼저 주님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까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하니 다른 제자들은 나중에 하나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합니까? 신령한 눈이 가장 밝은 사람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봅니다. 주님이 떠나신 것도 제일 먼저 알고, 돌아오셔도 제일 먼저 알아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많이 배운 것이 눈에 먼지처럼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사랑 가운데서 장성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했다면, 마련하신 낙원 한가운데 살며 생명나무의 열매만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예수를 사랑하는 그 제자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비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물으셨다면 자기 중심으로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고백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알아볼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먼저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주님이 찾아 오셨는데 언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까? 그물에 고기가 많이 잡힌 순간 요한이 베드로에게 “저 분이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신 사실을 우리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결과를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기쁜 부활주일을 맞아 온 성도가 시간을 따라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드립니다. 이것이 사람에 의해 하는 일입니까? 여러분이 어느 기관이나 단체의 동원 지시를 받고 나오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여기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 오늘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주님을 뵌 분이 비밀을 지켰습니까? 아닙니다. 그와 배에 함께 있던 사람에게 귀엣말로 말했습니다. “베드로 형님, 저 분이 주님이십니다.” 베드로가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오신 주님을 만나 뵈셨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의 음성을 들으셨습니까? 그러면 이 사실을 가장 가까운 분에게 말씀하세요. 한 번이라도 말씀하세요.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라고.

    못 자국난 주님의 손을 보세요. 창 자국난 주님의 옆구리를 보세요. 자세히 보세요. 그리고 같이 기뻐합시다. 여러분, 어디서 누구에게도 우리에게 주님이 오셨다고 말씀하세요.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뜻깊은 부활주일에 많은 사람에게, 먼데 있는 사람에게 말 못해도, 내게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라고 말씀하세요.

    베드로는 요한의 말을 듣자마자 벗었던 옷을 주워 입고 물에 뛰어내려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는 열심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어떤 이의 전도를 받고 그 전도한 사람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봅니다. 
    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열심의 불을 붙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요한과 같이 주님을 분명히 알아 뵙고 이웃에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활주일은 주님이 다시 사셨음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알리는 날입니다.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여기 오셔서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첫째, 제자들이 새 힘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새워 가며 고기를 잡느라고 애쓴 제자들, 그것도 고기가 많이 잡혔으면 재미가 나서 힘도 덜 들었을 것인데 아무리 애써도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은 몹시 피곤했고, 맥도 빠졌고, 배도 고팠을 것입니다. 주님이 마련하신 조반을 먹고 배도 불렀고, 주님을 만나 뵙고 나니까 새 힘이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날 저희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25리쯤 떨어진 곳, 엠마오라고 하는 촌으로 가면서 예루살렘에서 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희 가까이서 동행하셨지만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때 두 사람 중에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당신도 예루살렘에서 오시는 것 같은데 근일 거기서 된 일을 듣지 못하셨어요?” 
    “무슨 일인데?” 
    “예, 나사렛 예수의 일인데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인데 우리 가운데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다시 사셨다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우리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과연 여자들의 말한 대로임을 보았지만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같이 가던 분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동안에 엠마오 촌에 거의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행하던 분이 가시려 하는 것을 저희가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여기서 하룻밤 쉬고 가시라고 간청해서 집에 들어가 음식을 들기 전에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데 저희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웠지?” 그들은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서 열한 사도와 거기 함께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말할 때 이 두 사람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사실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사람들은 맥이 탁 풀려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어깨는 늘어지고, 발걸음에는 맥이 없고, 시선은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걸으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새 힘이 솟아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엠마오 어느 주막집에 그대로 머물러 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 힘이 생겨 예루살렘에 힘있게 돌아와 그들이 만나 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 IMF 시대를 맞아 맥없이 지내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자신감마저 잃어버리신 분 안 계십니까?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 만나면 새 힘을 얻게 되실 줄 믿습니다.

    둘째, 슬픔을 이겼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곳에라도 가보고 싶어서 새벽 일찍 갔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다시 사신다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는 냉대의 대상이 되어 왔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마리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아 완전히 새사람이 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독실한 신앙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의 전 소망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신 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젖어 드는 슬픔과 고독은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을 보고 울면서 서 있었습니다. 이때 한없이 울고 서 있는 마리아의 등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조용하고도 인자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
    이 말은 “이제 울 만한 이유가 없는데 왜 우느냐? 그리고 이미 죽은 예수를 찾을 필요가 없고, 죽었던 예수는 다시 산 예수로 네 앞에 있지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슬픔을 주는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큰 슬픔은 고독입니다. 외로움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은 고독의 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독에 붙잡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서서 예수님을 뵙는 순간 그녀의 슬픔과 고독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 슬픔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왜 우느냐?”고 물으십니다.

    셋째,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제자들은 유대인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인 집의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 말고는 평소에도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겁쟁이였습니다.
    그러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잡히게 되니까 아예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큰소리치며 장담하던 베드로도 얼마 동안은 멀리 서서 따라가다가 가야바의 뜰에서 주님이 심문 받으시는 것을 보고 그만 겁에 질려 두려운 생각에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게 되니까 이제는 자기들에게 화가 미칠 것 같아서 두려워 떨며 예루살렘 어느 동지네 집에 모였습니다. 문을 다 잠그고 아마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사신 주님께서 바로 그 방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평안을 비셨습니다. 이 평안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요사이 기업의 구조 조정으로 언제 직장에서 그만 두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해하는 직장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쉬는 날인데도 주일에 사무실에 나가 자기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얼마나 불안하면 쉬는 날 직장 사무실에서 의자를 지키고 있을까요? 정신적인 불안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여기 오셨습니다. 그리고 공포 속에 움츠리고 있는 우리에게 참평안과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과 함께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위대한 사명을 맡게 되었습니다
    조반 먹은 후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의 다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여기 오셔서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마음으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사랑을 다짐하신 후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가 여기 왔으므로 네가 새 힘을 얻었느냐? 슬픔을 이겼느냐?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이제 네게 있는 시간, 지식, 재물로 봉사하라.” 

    주님은 우리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해 다시 사셨습니다. 지금 우리 위해 여기 오셨습니다. 새 힘 주시기 위해,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두려움을 이기게 하기 위해, 사랑을 다짐하고 새 사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드립시다. “주님, 지금부터 저는 주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주님이 저의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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