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15:01-20/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 조회 수: 335, 2013.11.08 20:25:38
  • 리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이 기쁜 부활주일에 부활의 권능과 승리가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은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웅대하고 가장 어려운 장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내용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에게 잘 납득이 가지 않는 한 구절도 여기에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몸이 다시 산다는 사상이 주로 취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도 사도 바울이 말한 진실한 의미와 더불어 생각할 때 그 뜻이 명백해지고 의미를 납득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정한 것은 몸이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몸으로 다시 살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능성도 부정하는 것이 되고 기독교의 주장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상을 보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6편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니이까” 했습니다. 
    시편 30편 9절에 보면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양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했습니다. 시편 88편 10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오리이까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했습니다. 

    시편 115편 17절에 보아도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서는 아무것도 못하리로다” 했습니다. 이사야 38장 18절에 보면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보지 못하되”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9장 4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구약 성경에는 사후의 생명에 대한 암시가 극히 약간이나마 보이는 것도 확실합니다. 구약 욥기에 보면 욥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훗날에 한 옹호자가 나를 위해 이 땅에 서실 것을 압니다. 이 몸은 비록 해체되어 없어질지라도 나의 생명은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사람은 가깝고 존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이 교제를 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 성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16편 9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죽어도 개인성은 존귀하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이원론적인 사상이 있어서 육체는 거룩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육체는 물질이고, 모든 악의 근원이고, 영혼을 속박하며, 방해하고, 감금하는 감옥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에 반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육체가 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몸을 입으신 이상 육체는 악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육체는 비천한 것도, 더러운 것도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뭐라고 했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우리의 이 몸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원론 사상에 근거해서 육신을 멸시하는 헬라 사람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이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부활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며 개인으로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몸의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욥기 14장 4절에 보면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겠느냐”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욥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Man thinks he was not made to die). 옛날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장생불사를 위하여 승로반에 찬 이슬을 받아먹었다는 말도 있고, 일대의 영웅 진시왕이 당시 중원을 평정한 후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 삼신산(三神山)인 한국에 동남 동녀 500명을 보냈다는 전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은 이러한 인간의 깊은 욕구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한 대답입니다. 요한복음 4장 19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니 너희도 또한 살리라.”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같은 장 55절에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주일은 사망과 무덤에 대한 생명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긴다고 로마서 8장 37절에 말씀하셨고, 요한일서 3장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활주일이야말로 사람은 단순히 피와 살뿐이라는 유물주의적 견해에 대해서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웅변적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주일은 진리의 최후적 승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을 회고해 보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 가르치신 진리의 수정같이 맑은 화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회칠한 무덤 같은, 말하자면 겉으로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마음을 품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진영이 항상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행치 않았습니다. 잔과 소반의 겉은 깨끗이 하느라고 했지만 그 안에는 토색과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이와 같은 외식과 거짓의 화신인 이 무리들은 항상 예수님과 안식일 문제, 성전 문제 같은 것으로 논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진리는 십자가에 달리고 거짓은 일시동안 개가를 불렀습니다. 진리를 무덤 속에 깊이 간직한 채 거짓은 평안히 침상에서 발을 폈던 것입니다. 일시적이나마 미움이 사랑을 이겼습니다. 불의가 공의를 이기고 개가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돌로 막았던 무덤은 열리고 진리는 영원히 빛나게 되었습니다. 
    오,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여! 진리는 결국 최후의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사랑이 결국은 이긴 것입니다. 광명이 어두움을 물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주일은 사랑의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격화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는 갈릴리의 어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어린아이들, 심지어 세리와 죄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르치고, 어루만져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먹이시고, 함께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응수되었습니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한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연락을 즐긴다”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순결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기와 미움으로 응수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편 손이 말라서 고생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한시라도 빨리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고쳐 주셨지만,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면서 나가서 헤롯당과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것을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시기와 미움은 참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사람이 영원히 무덤 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왜요? 사랑은 길이 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죽음과 거짓과 미움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을 보세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보이셨습니다. 왜요? 부활은 너무 믿기 어려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도마 같은 사람은 예수님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할 때 “나는 내가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손을 만져 보고 그 옆구리의 창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드레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보지 못하고 믿어서 더욱 큰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과학의 세계를 넘어선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야말로 상심되고, 허무하기도 하고,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같은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나 다시 해 보겠다고 하면서 맥없이 떠났습니다. 
    어떤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고 맥없이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눈은 빛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구원할 줄 알았는데.” 이런 탄식을 하면서 그들의 이상이었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짐작이지만 어쩌면 이 제자들은 한적한 곳으로 피하여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려 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환멸과 실망, 나약과 비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의 형편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제자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승리감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것뿐이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겁해졌던 제자들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용기와 담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사람의 조작으로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여전히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어두움이 빛을 몰아내 밤같이 어두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정의가 불의에게 눌림을 당하고, 양심의 소리가 권력에게 무시를 받고, 진리가 거짓에게 희롱을 당하고 살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어두움의 권세를 몰아내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이 세상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겁내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담대합니다. 어떻게 그처럼 비겁하고 나약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 부활의 사건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 같은 제자는 협박하는 공회 앞에서 “내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나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만 있으면 나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나 권력이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했습니까? 예수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주 안에 사는 내가 다음 열매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담대하게 우리의 말과 생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만의 찬송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공포와 좌절에 빠져 있는 이웃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기쁨을, 두려워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는 담력과 평안을,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확신을, 낙심한 제자에게는 소망과 용기를, 주님을 부인한 제자에게는 새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 만나고 그를 영접해서 “주님 부활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Consultaca.com

    2021.05.01 15:09

    https://consultaca.com/redir/?ca=12115
    부활절 설교자료 - 고전 15:01-20/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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