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고전 15:1~8/ 부활
  • 조회 수: 1791, 2017.05.12 16:29:27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서론>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동안 식물들은 다 생수가 마르고 생기가 그쳐서 죽음이 산야를 덮습니다. 그러나 봄의 계절이 다가오면 생수와 생기가 넘쳐나고 그 가운데서 부활의 생명과 아름다움이 소망의 노래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부활의 약속은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움트는 풀 한 포기에도 약속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회에 있어 4월은 축복의 계절입니다. 지금부터 119년 전 1885년 한국 최초의 공식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에 도착한 날이 4월 5일 부활절 아침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에는 이런 기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부활절 아침, 그들이 드린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지고, 이 나라가 역사상 유례없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본론>
    1. 죄로 인한 사망
     우리는 왜 이 땅에 죽음과 슬픔이 이렇게 많습니까? 우리가 왜 죽어야 됩니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망을 잃은 사람 이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죽음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죽음이 인생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지으셨을 때 죽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죽지 않을 몸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몸이 죽게 된 것은 죄 때문에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죗값으로 사망이 인류를 지배할 때까지 죽음은 우리에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죽음이란 자연법칙이 아닌 죄 때문에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죽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안 지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지구에 사람이 꽉 들어차면 또 다른 지구를 만드시고 또 다른 지구를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값으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람이 살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일지라도 인간의 삶은 슬픔과 고통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오신 것인데 죽음에서 그냥 건질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원인인 죄를 청산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죄를 청산하시고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 없이 잉태되었고 죄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느냐. 당신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의 죽음은 여러분의 죄를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2.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죽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고난은 인류를 대신하여 죄와 사망을 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쟁이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의 가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을 우리는 요한복음 11장에 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멀리 갈릴리에 가 계실 때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되는 동구 밖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 불행이 다가왔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신속히 소식을 보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와서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와서 병 고치는 것은 하도 허다한 사건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3년 동안 사역한 온 이스라엘 땅은 병원과 같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라고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뛰어서 오셔서 고쳐주실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 소문을 듣고도 그대로 갈릴리 땅에서 이틀 동안 더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완전히 죽었다는 것은 집안 식구들에게만 죽은 것이 아니라 온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만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무덤에 장사 지냈는데 썩은 냄새가 나는데 제자들을 데리고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마음에 아주 한이 서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리가 병들었다는 소리만 들어도 뛰어오실 줄 알았던 주님이 기다리는 우리를 더 내버려 놓고 죽어서 냄새가 나도록 무덤에 파묻고 난 이후에 오셨습니까?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마르다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 말을 하니까 예수님이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계시거든요. 아하~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구나. 마르다는 즉시로 말을 고쳤습니다. 주님이 지금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줄 줄 믿습니다. 그는 급해서 한 말이었지 진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보시고 여자여, 네 오라버니가 살 것이다. 그러니까 예~ 물론 살 것이지요. 우리 오라버니가 부활의 그날에는 살아 일어날 줄 믿습니다. 원망스러운 말, 탄식스러운 말을 보태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라버니가 지금 살 것을 말한 것입니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 것이라고 하니까 물론 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모시지 않습니까? 우리 오라버니가 사람들이 다 부활할 그때는 부활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라고 말하니까 예수님이 마르다를 보시고 “내가 너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은 현재이지 마지막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나니 이 말을 믿느냐?” 대답하기 곤란하지요. 여러분 우리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니 지금 살리러 왔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긍정적으로 ‘우리 오라버니를 지금 살릴 것입니다’라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마음이 꽉 들어찼기 때문에 그는 ‘주님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지금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니까 예,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실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습니다. 아주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마르다와 입씨름을 해서는 끝이 없겠습니다. 마르다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고 아주 일을 터뜨려 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와 이야기가 안되는 줄 알고 마리아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마르다가 뛰어가서 앉아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주님이 나는 사람 취급 안 한다. 너를 오라고 한다. 물론 평소에도 주님께서는 나보다는 너를 사랑했는데 이것 너무 차별해도 이럴 수가 있느냐. 빨리 가봐. 빨리!’ 마리아가 일어나서 눈물을 닦으면서 예수님 기다린 곳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좀 더 나은 신앙고백을 해줄 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다는 늘 와서 장차 부활할 줄 믿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다 부활할 그날에 우리 오라버니도 따라서 부활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습니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했습니다. 마르다를 데리고 신앙고백을 가지고 기적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마리아를 불러서 마리아는 주여, 지금 우리 오라버니를 살리러 가십시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오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리아가 눈물을 닦으면서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주님, 나흘 전에 이곳에 오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을요. 너무나 원통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별도리 없이 같은 소리 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실 때는 현재 살아계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적을 행할 주님을 고백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오시면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주님 오늘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기적을 행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흘 전에 오셨으면 기적을 행해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흘 전에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지금 현실에 부딪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부활의 날에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에 와서는 우리 오라버니를 살릴지 몰라도 지금은 못합니다.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무력한 허물을 덮어 씌웠습니다. 예수님 지금은 안 됩니다. 과거나 역사하셨고 장차할지 모르나 지금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잘못도 있거니와 오늘 우리들도 그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은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고 큰소리 합니다. 그러나 그 과거에 잘한 예수님은 오늘은 어디에 있느냐. 몰라요. 오늘은 어디 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구름타고 오시고 죽은 자를 다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떻게 하느냐? 오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예수님, 미래의 예수님은 계셔도 오늘의 예수님은 없지 않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큰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의 예수가 없으면 우리는 죽은 예수를 모시고 무엇을 한다 말입니까? 오늘날 세계 모든 종교는 종교를 창시한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종교는 남아있거니와 창시한 자들은 죽는데 예수님도 죽었다면 기독교도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이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느냐. 주님께서 분노하시고 그리고 탄식을 하시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버니가 죽어도 속수무책인 그 고통에 빠져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이 영적으로 병들고 육신적으로 병들고 생활에 병들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에게 당하는 큰 불행이 주님이 원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잘못하고 원수 마귀가 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로써 우리에게 큰 불행을 갖다 주실 때 주님은 우리와 같이 통곡을 하고 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왜 이런 일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지 못했느냐’ 우리가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도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함께 울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니 주님이 눈물을 뚝뚝 흘리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몰인정한 하나님이 아니시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참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온 나라와 온 국민이 울고 계실 때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울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진실로 통곡을 하고 우셨고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 자식을 잃고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주님이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냥 울기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예언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6백여 년 전에 먼저 했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무엇을 할 것을 예언한 가운데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고 죽어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6백여 년 전에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성경에 예언한 말씀을 깊이 간직해야 될 것이고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바로 현재 살고 있는 지금 여러분을 위한 예언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것이 아닌 예언은 예언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보고 주님께서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사야 53장 1절로 12절까지를 읽으십시다. 이것은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지금 주시는 예언인 것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지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당한 그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도 남김없이 여러분과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내가 예수님이 고통 받은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장차는 오늘보다 영화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고, 다음 달은 금번 달 보다 나아지고,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지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고통을 다 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을 얼마나 상세하게 이사야가 예언을 해놓지 않았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러분 죄가 예수님이 짊어진 죄요, 허물도 여러분 대신해서 담당을 했고, 저주를 짊어지고 온갖 고초를 당했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것은 우리의 병을 대신 짊어졌고 그가 죽은 것은 우리 죄 때문에 죽었고 무덤에 들어간 것도 우리 위해서 무덤에 들어갔고 이 모든 고통을 사흘 만에 다 청산하고 부활하셨을 때는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자기 위해서 부활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은 죽을 필요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러나 여러분 위해서 부활했으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고 이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수 천국 내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갈 곳은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섯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해거름에 내가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외치고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는데 다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여러분, 주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말 중에 안 이루어질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영혼의 죄도 다 청산했고 범사에 저주도 다 청산했고 질병도 다 걸머졌으므로 이제 너희들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 때문에 종의 멍에를 멜 수 없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 하신 것을 우리가 마음속에 기억하고 깊이 결심을 하고 다시는 죄도 받아들이지 말고 허물도 붙잡지 말고 질병도 용납하지 말고 저주와 가난도 담지 말고 단호하게 물리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슴에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인 것입니다. 첫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었는데 아담은 첫인류 조상으로써 범죄하여 우리를 영원한 고통 속에 빠뜨린 분인데 예수님은 또 인류의 조상으로 왔는데 둘째 번 인류의 조상, 마지막 인류의 조상으로 오셨는데 어떤 인류의 조상이냐, 우리의 새로운 인류 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옛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새로운 인류의 조상은 예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와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용서를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생복락을 주신 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03편 1절로 5절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노래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얼마나 좋은 은혜의 말씀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인류의 조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영원한 새로움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식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이제 예수님은 죽음에 눌려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근원지로써 우리에게 와 있으며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감사하고 찬미할 때 예수님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고 생기가 넘쳐나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8절에 예수님이 바로 그 말을 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님은 지금은 성령으로 살아계셔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슬람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했던 한 그리스도인은 인터뷰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인생을 살다가 길을 잃어버려 방황을 하며 살았습니다. 한참을 방황하던 중 두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죽어 있었고 한 사람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길을 묻는데 죽어 뻗어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물론 살아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봐야지요.” “살아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죽은 사람에게 내 인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그 전에는 마호메트에게 길을 물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살아 계신 분, 예수님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예수님을 선택한 이유인 것입니다.” 마호메트는 죽었는데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물어서야 올바르게 길을 알려 줄 턱이 있습니까? 살아계신 예수님께 길을 묻고 인생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살아 있는 창시자를 갖고 있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예수님을 믿으면 미래의 부활을 약속 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부활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장차 죽었다가 살 뿐 아니라 영원히 부활해서 지금도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생수를 부어 주십니다. 그 속에서 생명수를 주는데 생명수는 목이 말라 갈증으로 죽어가는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면 평안과 소망과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를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생기를 부어 주시면 여러분의 마음에 희망과 큰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 강수를 마시고 생수를 숨 쉬고 우리는 이 땅에서 즐거움을 갖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미래의 부활을 약속받은 것은 말할 필요 없어도 부활의 삶을 살며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의 강을 주시고 생명의 기운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대해야 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마귀의 훼방과 궤계를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이기셨고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마귀와 귀신을 완전히 이기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로 22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44절과 58절에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여러분, 육의 몸을 가지고 앉아 와 계시나 속에는 영의 몸이 같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영의 몸이 육의 몸을 옷 입고 와서 앉아 계신 것입니다. 그 영의 몸은 여러분,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고 꿈을 갖고 믿고 긍정적으로 긍정하면 그 영의 몸을 통해서 여러분 주위 세계에 변화가 오고 기적이 다가오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3차원의 세계는 여러분 육체의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세계는 먹고, 입고, 마시고, 이 세상에 활동하나 기적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에 영혼은 4차원의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꿈을 꾸고 믿고 말을 통해서 없는 것을 있게 하고 기적을 베풀고 영광을 성취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속에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잡혀서 육신이 끌려 다니지만 큰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면 여러분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주님이 값 주고 산 모든 것은 생각 속에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꿈을 꾸고 있는 그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으면 영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을 수 있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입술의 말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마음이 아주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으니까 몸이 한기가 들고 고통스러워요. 내일 설교 못하겠구나. 몸이 막 덜덜 떨리고 마음에 고통스럽고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 싶어서 주님께 기도를 했어요. 주님, 마음이 이런 상태에 있어서 나는 내일 설교를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내 가르쳐줘도 모르냐? 뭘 가르쳐줘요? 속사람은 뭐하고 사느냐? 긍정적 생각하지? 네. 성도들을 만나서 말씀을 증거할 꿈을 꾸고 있지? 그래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기적을 믿느냐? 믿어요. 그러면 그것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지요. 입으로 시인하다가 잠들어라. 그래서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내일 설교할 수 있는 건강을 얻기 위하여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도다. 깨니까 아침이 되어서 몸을 흔들어 보니까 깨끗해요. 야~ 속사람이 살아있구나. 역시. 겉사람은 약하나 속사람은 강하구나. 그 속사람의 은총으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속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기적을 가져올 수 있는 속사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고 그를 통해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안 믿는 사람이나 혹은 믿는 사람 조차도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어떻게 부활하노? 오늘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도들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생명을 바쳐 전하는 복음은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자기를 포함한 사도들은 모두 사기꾼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그러므로 부활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2013년 작년 한해 우리나라 사망자 수는 26만 6천 5백 명으로 하루 평균 730명, 시간당 30명이 병원이나 집, 거리 등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간당 30명이 죽어 가는데 우리가 설교하는 이 시간에 30명이 죽어가니 언제 우리 차례 가 올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으로 태어나서 구원도 받지 못하고 살다가 음부로 쓰레기더미처럼 밀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생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므로 부활의 소망이 있는 우리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즐거워하고 죽음이 다가와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와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여러분은 승리를 가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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