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20:1~18)
  • 조회 수: 147, 2021.12.13 09:48:29

  • 성경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기적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구약에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사건이요, 신약에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들 중에 가장 먼저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천지 창조와 부활의 기적을 믿기만 하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천지 창조와 부활은 중요한 것입
    니다.
    인류 최고의 기적 ‘부활’
    기적은 자연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을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적은 인간의 이성, 상식, 경험 등으로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영적 믿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
    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
    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1절 말씀에
    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안식일은 오늘날 토요일에 해당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이니까, 주일에 해가 뜨기 직전인 새벽을 말합니다. 현재 우
    리가 주일에 안식하는 이유는 곧 예수님의 부활 사건 때문입니다. 원래 인류는 토요일에 안
    식했지만, 예수님께서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주일에 안식하는 겁니
    다.
    주일 이른 아침에 아직 어둠이 깔려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의 무덤에 온 것입니다. 그저께 골고다 언덕에서 있었던 잔인한 십자가 처형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여인들은 시쳇말로 한이 풀리지 않은 것입니다. 울분이 일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삼킨 채 그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던 상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주일에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으로 온 것입니다. 여인들이 여럿이 있었지만,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마 그녀의 행동이 특이했고 그 상황에서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
    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이 들려 짐승처럼 살았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얻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만큼 헌신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님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킨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특별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
    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서 도착해 보니,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병도 없
    고 육중한 돌문도 옆으로 굴러져 있으며 무덤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본능
    적으로 혹시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급히 발걸음을 돌려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때가 아마 오전 5시 30분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관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으면 많은 것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창조를
    믿지 않으면 많은 것들을 풀 수 없게 됩니다.
    텅 빈 예수님의 무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람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
    해 다른 여인들도 함께 무덤에 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의 죽음
    과 장례 절차에 대해 충격을 받고 안정을 찾지 못한 상태인데, 시신마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충격을 받습니다. 3~7절 말씀을 봅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
    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
    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이 말씀에서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태도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암시해 줍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의
    매우 다른 성격입니다. 두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황급히
    뛰었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랐다고 합니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해 무덤 안
    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부터 살핍니다.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면면이 살피는 관찰력
    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덤 안으로 뛰어
    듭니다. 베드로의 다혈질적 성품을 그대로 말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
    격이 급한 사람,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 행동이 민첩한 사람 등 여러 유형의 사람이 모이지
    만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사역에 나름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
    이 좋고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
    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잘못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탁월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면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품이 판이하게 달랐지만 팀을 이뤄 사역한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
    다. 요한은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성품대로 예수님 무덤 안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신은 없
    고 세마포만 놓여 있을까요? 시신이 스스로 세마포를 벗었든지 아니면 누군가 벗겨주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마포가 놓여 있다는 것은 마치 누에가 고치를 빠져나오듯 예
    수님께서 세마포를 빠져나오셨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
    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시신이 스스로 세마포와 수건을 벗을 수 없다는 점입니
    다. 만약 시신이 스스로 벗는다면, 세마포와 수건이 헝클어져 있든지 한 곳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마포와 수건이 따로 놓여 있다는 것은 시신이 그대로 빠져나간 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8, 9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과 여인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신 부활에 대해 믿었더라면 모든 것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워 합니다. “태초에 하나
    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을 믿는 순간에 성경의 모든 세계가 파노라마처
    럼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다른 것을 못하실 리 없습
    니다.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없던 것을 생겨나게 하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천
    지 창조에 대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려 하니까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잘
    맞는 것은 창조론이 아니라 진화론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 아님에
    도 불구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큰 충격과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는
    데 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무덤 안은 마치 잘 정돈된 호텔 방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믿지 않았기 때문
    에 당황하는 겁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 제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반대하다가 기적이 계속 일어난
    다면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예수님과 기적을 믿지도 못하고 부인도 못하며 어정쩡한 상태로
    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주일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쯤 일
    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무덤 안을 지키는 두 천사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아마 막달라 마리아가 예
    수님께 대한 사랑이 그랬나 봅니다. 11, 12절 말씀을 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 안에서 보지 못한 천사를 막달라 마리아는 보게 됩니다. 두
    천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의 무덤 안에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려고 울다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이 순간에도 천사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천사는 우리의 예배를 돕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중에 천사를 보
    는 사람이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
    실 때, 마귀도 예수님을 공격을 했지만 천사도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기도할 때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기절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힘이 생기
    고 찬송이 넘치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난다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거나 천사들이 돕
    기 때문인 줄로 알아야 합니다. 저는 환자들을 심방할 때마다 항상 천사가 병상을 지키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울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막달라 마리아
    이런 현상을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 안에서 발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 안 됩니다. 다만 보지 못했을 뿐이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현대의 지성인들이 범하기 쉬운 죄악입니다. 13, 14절 말씀을 읽습
    니다.
    천사들이 “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를 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제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다만 믿음이 있는 척 할 뿐인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
    적, 합리적, 세상적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 합니다. 죄송하지만,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남편(아내)을 사랑하십니까? 그냥 살 뿐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
    니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제도와 습관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랑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은 사
    실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판
    단으로 결정하지 믿음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시작이 됩니다.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마리아에게 보이신 예수님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이 14절 말씀에 있습니다.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천사들에게 사
    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을 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거
    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입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
    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을 때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받고 있을 때, 절
    망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자
    기 슬픔이 크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많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
    다. 마찬가지로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1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
    져 가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도
    사랑해서 따라다녔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영적 벽입니다. 기도
    하고 금식해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예배 때 도와주는 천사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
    라).”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듭니다. 드디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의 실체를 목격한 것입
    니다. 17, 1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
    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
    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이번에 저는 보스턴을 여행하면서 이기복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이 좀
    어렵던 이 목사님의 조카가 보스턴에 살고 있는데, 그 조카와 저는 서로 스치게 되었답니
    다. 저는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저와 인사를 하는 순간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 번이나 들었답니다. 그래서 어린 자매가 놀라서 이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저의 입으로 그런 말을 말하지 않았다
    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확실한 음성을 듣고 이 목사님에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께서 그 이야기를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부활의 예수님
    언젠가 제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제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로 착각했다는 이야
    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설교 중에 병이 낫기도 하고, 하
    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듣다가, 찬송을 하다가 영적 통찰력
    을 얻고 막혔던 문제를 해결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곧 그 자리에 천사가 있고 예수님께서 함
    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대고 말하는 차원을 넘어 실제로 그대로 응답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돌문이 굴러나고 속은 텅 비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무엇을 보겠습니까? 화려한 건물, 프로그램, 사람들, 사역을 봅니까? 결코 아닙
    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예수님께서 함
    께 하시며 성령님께서 그 예배를 도우십니다. 천군천사로 하여금 우리의 입술을 열게 합니
    다. 지금 이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셔서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제하시고
    거룩하며 의롭게 만드십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놀랍게도 육체가 새로워지고 영혼이 빛나게 됩
    니다.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평화와 거룩을 경험할 것입니다. 무덤 안에
    천사들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셨던 것처럼, 울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던 막달라 마리아
    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던 것처럼, 이제 지치고 병들어 모든 희망
    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부
    활하신 예수님을 꼭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만나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천군천사가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우리의 영안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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