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사신 주님의 네 가지 말씀(요 20:19~23)
  • 조회 수: 288, 2021.12.13 10:04:19


  • 이 기쁜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사랑하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부활의 사실을 빼놓는다고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고 사실 기독교가 존재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 보면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네 차례에 걸쳐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만나 주십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피의 값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일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탐구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화목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수난이요 십자가와 죽음입니다. 더구나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렇게 감격 속에서 지키는 부활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우리 위해 다시 사신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은 슬픔 가운데 잠겨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광경을 보고, 무덤에 묻는 것을 지켜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었던 여자로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냉대의 대상이 되었던 말하자면 인간 폐물이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마리아의 소망이요, 생명이요, 인생의 전부이던 예수님이 참혹하게 세상을 떠나실 때 그의 마음에 오는 슬픔과 고독 그리고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큰 슬픔은 고독입니다. 외로움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 교회에서 41살 난 젊은 형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별 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젊은 부인이 믿음의 자매들과 함께 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가슴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지금 있지만 이제 혼자 외롭게 지내며 두고두고 눈물 흘릴 생각을 하니 그렇게 안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찾아드는 고독이란 무서운 고통입니다. 
    이 슬픔과 고독에 싸여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다시 사신 주님이 찾아오셨고, 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 슬픔과 고독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기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슬픔과 고독으로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주님 만남으로 기쁨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의심에 잠긴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말을 할 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증거하면 할수록 더욱 의심스러웠습니다. 
    우리가 흔히 의심 많은 도마라고 말합니다만 도마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친구의 말이라고 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실증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의심을 가시게 하고 확신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의심하는 우리에게 다시 사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남으로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사신 주님은 실망을 안고 실패를 거듭하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신 후 베드로는 “3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얻은 것이 이것뿐이구나.” 이렇게 실망한 나머지 옛 직장인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어부 출신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나섰습니다. 3년 동안이나 놓았던 그물을 다시 배에 싣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 헛그물질을 했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할 때입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했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눈치 빠른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시다!” 하는 소리에 모두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드신 후 가장 존귀한 사명을 버리고 떠났던 베드로를 불러 인간의 영혼을 먹이고 기르는 대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오늘도 실패로 말미암아 쓴 잔을 마시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새 힘을 주시며, 다시 일어나게 하시며, 더 좋은 삶의 목적을 위해서 살도록 희망을 안겨 주십니다. 

    그리고 네번째 나타나신 것은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모인 집의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워했을까 하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게 되니까 다음 차례에는 자기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 내다보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면서 예루살렘 어떤 동지의 집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숨을 죽여가며 앉아 있다가 밖에서 무슨 이상한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실 빌라도의 정치적 권력이 두려웠습니다. 가야바를 대표하는 유대교 신봉자들도 무서웠습니다. 더구나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라고 하면 누가 받아 줄까 하는 불안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다시 사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네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비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상적인 인사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너희가 근심과 두려움과 낙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사말 후에 다시 사신 예수님은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죽어도 다시 살고, 모든 불의와 악의 권세도 이겨 낼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왜 두려움이 있습니까? 불안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육신적인 것보다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불안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유지되지 못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유지되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죄 때문입니다. 죄 지은 사람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성경에도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동산나무 뒤에 숨었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왜 무서웠습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해서 그럽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것을 하지 않아도 죄가 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을 해도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따먹었습니다. 따먹고 나니까 평안했습니까?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졌습니다. 죄를 범하면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동산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저희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먹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짐승을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를 대신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까지 사람들이 앞에 나아갈 때마다 잡은 짐승의 수가 얼마인지 그 수를 우리는 기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된 우리들 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슨 죄를 범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의 공로를 의지할 때 용서를 받고 참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합니다. 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강물같이 흐르시기를 바랍니다. 

    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세상으로 나아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인류 구원의 큰 일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 하나님께 올라가시면서 만민에게 전할 복음을 제자들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부탁하실 때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부활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사신 자신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의심하던 제자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두려움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하러 보내십니까? 복음을 전파하라고. 어디로 보내십니까?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군인이면 군부대에, 학생이면 학교에, 기업가는 기업에, 가정주부는 가정에, 공무원은 관공서에, 회사원은 사무실에, 기술자는 공장에, 상인은 가게에 우리를 보내십니다. 
    오늘 교회의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주일에 예배당에 모이는 것은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주간 동안 이 세상에 나가서 삽니다. 그것은 흩어진 교회입니다. 모이는 교회에서 힘을 얻어 세상에 흩어져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우리 하나하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는 5월 둘째 주일을 이웃 초청의 날로 정하고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실 때는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고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모세를 “가라.” 하실 때 “내가 너와 함께 하마.” 여호수아를 향해 “강하고 담대하라.” 하실 때 “내가 너와 함께 하마.” 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꼭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 믿으시고 힘차게, 담대하게, 늠름하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된 것처럼, 에스겔이 해골 골짜기에 생령을 명할 때 송장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를 이룬 것처럼, 다시 사신 주님은 성령으로 제자들을 생동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생동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까?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면서 주님이 다시 사셨음을 보여 주셨지만, 이 부활의 사실을 믿고 이 부활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힘과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활의 신앙은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생기를 받아서 생령이 되듯이, 마른 뼈들이 생명의 바람이 불어지니까 다시 살아나는 듯 성령을 받을 때 부활을 믿게 되고, 부활의 신앙을 가짐으로 힘과 능력을 얻게 되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뵈었지만 그것은 잠깐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각각 흩어지고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씩 따라다니면서 교육을 받고, 듣고, 보고, 느끼기는 했어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적인 혈기는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비장한 각오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뒤따라오면서 이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우리들이 차지할 자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동상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이 바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외롭게 사셨습니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떠나고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날 때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가령, 베드로를 보세요. 그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전에는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것을 막고 나선 것도 인간적으로 그럴 수 없어 보여서 한 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한 것도 그의 뜨거운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칼로 내려친 것도 베드로의 의협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것은 얼마 못 가서 바래 버리고 말았습니다. 위협 앞에는 움츠렸고, 죽음 앞에서는 주님을 부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베드로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데 죽음이나 고통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공회 앞에서 담대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니까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알게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책임과 특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용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것, 즉 부활을 믿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 아무리 악한 죄, 아무리 더러운 죄라고 할지라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용서의 선언과 말씀을 전파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악당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랑이 미움에게 졌습니다. 정의가 불의에게 밀려났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삼켰습니다. 진실이 거짓에게 조롱당했습니다. 악당들이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상태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을 헤치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네 가지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생동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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