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을 내쉬며(요20 : 19∼23)
  • 조회 수: 413, 2013.06.22 21:31:41
  • 저는 여태껏 상대가 특별히 요구하지 않는 한 제 나이를 만(滿)으로 대답해 본적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끼리는 한국 나이로 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 가는데 대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49년생인 저는 올해 들어 누가 물어도 스스럼없이 49살이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나이와 관련하여 엉뚱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귀가 길에 마침 시간이 남아 막내를 데리러 유치원엘 갔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방으로 들어가자 저를 발견한 승주가 `아빠'하고 달려왔습니다. 그러자 승주와 함께 놀고 있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뛰어오더니 느닷없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 몇살이에요?'

    아마 저희들끼리 나이에 관한 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평소대로 `49살'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불현듯 작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작년 봄 유치원에서는 `아빠와 함께 하는 날'을 실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와 아빠가 함께 어우러져 노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갔더니 아빠들이 거의 모두 3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제일 연장자였습니다. 하기야 대한민국에서 제 나이에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가진 남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49살'하고 대답하면 승주가 아이들로부터 `나이 많은 아빠의 아들' 이라며 놀림을 받을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날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아이가 다시 채근을 했습니다.

    `아저씨! 몇살이냐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넌 몇살이니?'

    질문만 던지고 승주를 데리고 얼른 나올 심산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저의 심중을 꿰뚫어 본 듯 재차 물었습니다.

    `5살, 근데 아저씨는요?'

    그 순간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끼여들었습니다.

    `아저씨! 몇살이예요?'

    그러는 사이 그 방안에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제게 집중되었습니다. 도저히 대답을 않고는 그 자리를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이되었습니다. 그때 제입에서 나온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음…만으로 48살이야!'

    그리고 승주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데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겨우 5살짜리 꼬마들에게 한 살이라도 더 적게 보이려고 `만으로 48살!' 했으니 도대체 어른 꼴이 그게 뭡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막내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생각들이 제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래, 자식을 위해서 한 살이라도 젊어보이려하는 이런 마음이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이구나.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지극하실까?

    이제껏 나의 산 날보다 살날이 분명히 짧은 만큼 승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나고 말겠지. 그러나 결코 늙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사랑인가? 그렇다면 자식사랑과 관련하여 지혜란 무엇일까? 언젠가 끝날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겠지.'

    그날은 참으로 유익한 날이었습니다.

     

     

    지난 9월 27일 밤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는 35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환호하는 가운데`록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그런 정도의 콘서트라면 간혹 있을 수 있는 대형공연이었지만 그날의 공연이 유독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60년대에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노래들을 불러 젊은이의 우상이 되었던 미국 가수 밥 딜런(Bob Dylan)이 출연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젊은이들의 축제에 교황 바오로 2세가 참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밥 딜런은 자신의 히트곡들을 부르던 중 그 유명한 `Blowin in the Wind'(바람속에 실려있다)를 열창하여 35만명의 젊은이들을 열광케 하였습니다. 그 노래의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노랫말이 됩니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쳐야만 하는가?

    하이얀 비들기가 모래 가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거쳐야만 하는가?

    평화가 정착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포탄들을 쏘아 대어야만 하는가?

    친구여,그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바다로 씻기어 사라지기까지 저 산은 몇 년이나 버텨낼수 있을까?

    참된 자유를 얻기까지 인간은 몇 년을 더 버텨낼수 있을까?

    한 인간이 도대체 몇번이나 보고서도 못본척 고개를 돌려버릴 수 있을까?

    친구여 그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진정으로 하늘을 볼 수 있기까지 인간은 몇번이나 머리를 치켜들어야만 하는가 ?

    울부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까지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만 하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상 당하고 있음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죽어야만 하는가?

    친구여, 그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네"

     

    교황 바오로 2세는 딜런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들은 뒤 노래가 끝나자 딜런과 악수를 나눈 다음, 35만명의 관객 앞에서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방금 한 인간이 인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쳐야만 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즉 진리와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이번에는 관객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전 밥 딜런은 인생의 해답은 바람 속에 실려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모든 인생의 해답은 언제나 바람 속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리저리 흩어져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바람이 아닙니다. 그 바람은 바로 주님의 숨결이자 음성입니다."

    교황의 그 말에 35만 여명의 젊은이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와 박수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그 말은 단순히 그 날밤 록·콘서트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기 위한 말치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해답이 바람 속에 실려 있으며 그 바람은 주님의 숨결이란 그 말은, 바로 오늘의 본문에 기초한 탁월한 강론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빈 무덤을 두 눈으로 확인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믿지 못하여 두려움에 떨며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제자들은 갈릴리의 하찮은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과 함께 3년이나 동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락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어찌 참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평안을 누린다 한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면 다시 불안과 공포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배신자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계속 신뢰해 주시고 중용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반드시 또 다른 배신을 행하는 법이거늘 과연 제자들만은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겁쟁이들에게 평안을 빌어 주시고 배신자들을 계속 중용하시겠다는, 얼핏 생각하면 시간 낭비요 헛일처럼 보이는 일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22절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아무리 겁쟁이였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건 참 평안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하기만 하면 씻을 수 없는 배신의 전과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제자로 중용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여기에서 숨을 내쉰다는 동사 emphuso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숨결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거룩하신 영―즉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숨결인 것입니다.

    이 헬라어 동사는 신약에서는 본문에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 같은 뜻의 히브리어 동사는 구약에서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흙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동사는 구약 에스겔 37장에서 한 번 더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여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 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마른 뼈, 해골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을 때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숨결이 그 마른 뼈에 들어가매 마른 뼈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다운 성령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숨결 속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영원한 숨결이요, 진흙을 생령으로 마른 뼈를 군대로 변화시키시는 창조의 숨결이요, 전능하신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숨결 속에 있을 때 겁쟁이가 평강의 사람이 되며, 배신자가 참제자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그 유명한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부귀영화의 상징입니다. 그럼에도 인생이란 너무나도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헛되다는 히브리 동사 habal은 숨결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hebel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숨결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숨결이 아닌 인간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숨결을 의지할 때 그 인생은 부귀영화와 주지육림 속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적처럼 인간의 숨결이란 이내 이리 저리 흩어져 버리는 헛바람인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내뱉고 있는 이 숨결은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내뱉는 즉시 우리의 숨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뿐입니다. 생명이란 곧 호흡이요 호흡이란 숨결일진대, 우리의 인생이 지금 헛바람이 되어 매초마다 이리저리 헛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체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헛바람을 의지하는 인생이 어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된 숨결로야 누구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무슨 가치 있는 일을 행할 수 있으며 어찌 영원을 지향하며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헛바람을 의지하고서야 어찌 불안에 떠는 겁쟁이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상황에 따라 배신의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아침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그 영원한 숨결, 진흙을 생명으로 만드시는 그 창조의 숨결, 마른 뼈를 군대 되게 하시는 그 전능하신 사랑과 생명의 숨결을 말입니다.

    겨우 7∼80년 헛바람만 일으키다 끝나 버릴 우리의 숨결 속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의문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실려 있습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 사랑치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곧 사랑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평강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능력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만으로 48살이던, 우리 나이로 49살이던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숨결은 헛바람이 아니라 영원한 바람,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바로 당신의 영원하신 숨결, 성령의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제껏 헛바람에 불과한 우리의 숨결만을 의지했기에,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또 헛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를 사랑하시사 불러 주시고 영원하신 주님의 숨결로,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일평생 이 숨결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 숨결로 사랑하게 하소서. 이 숨결로 영원을 살게 하소서. 이 숨결로 사는 우리의 삶이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령 충만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77 admin 224 2013.06.22
76 admin 282 2013.06.22
75 admin 444 2013.06.22
74 admin 337 2013.06.22
73 admin 210 2013.06.22
72 admin 317 2013.06.22
71 admin 328 2013.06.22
70 admin 251 2013.06.22
69 admin 483 2013.06.22
admin 413 2013.06.2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