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빛안에서의 삶(요 20:19-31)
  • 조회 수: 210, 2013.06.22 21:36:10
  •  현대인들은 다음 일곱가지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가난에 대한 공포, 두 번째는 실패에 대한 공포, 세 번째는 질병에 대한 공포, 네 번째는 사랑하는 자로부터 당하는 공포, 다섯 번째는 노쇠에 대한 공포, 여섯번째는 자유 상실에 대한 공포, 일곱 번째는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와같은 공포와 두려움은 오늘 우리들을 비롯해서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공포와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들에게 미움과 질투, 탐욕과 다툼을 일으켜서 서로 경쟁하게 하고 서로 죽이게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들을 보면, "두려워 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주겠노라"하는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서 3년 반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그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장면이 너무나 처참하고 비극적이었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 참상을 눈에서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어두움의 세력들이 언제 어떻게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님과 똑같은 비참한 처형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살길도 막연해 졌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어느 집 깊은 방에 문을 꼭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도 가장 먼저 천사들을 통해서 평화가 선포되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가졌던 죽음의 공포나 두려움을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평안과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평강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을 신속하게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라고 표현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기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생기는 현상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기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제일 머저 "마음의 평안"이 먼저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우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에 평강의 축복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에게는 마음에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만이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여러분,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 죄문제입니다. 
      그 죄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부터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눈같이 희게 하셔서 마음에 참된 평안을 갖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평강은 죄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주신 평강입니다. 승리자가 가지는 평강입니다. 더 이상 괴롭힐 자가 세상에서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당하게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위하여 전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할 때에 참된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로서 자기 양떼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면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면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이렇게 선한 목자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참된 평강을 맛보
    며 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나의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시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참된 평안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오늘 이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가실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마음에 채우고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면서 평강을 주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영만이 아니고 육체까지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의 상처를 가지신 채로 부활하신 것은 부활의 생생함을 알리는 뜻이 더 강했습니다. 
      이 부활의 확신이 후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 상처야말로 고귀한 흔적입니다. 제자들이 목격한 사실이기에 제자들의 생애를 통하여 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다시 사신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 제자들은 과연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가 승리하고 진리가 승리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심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일생동안 이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증거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 뒤에 도마는 그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이 일 때문에 도마는 의심쟁이가 되고 별로 좋지 않은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의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불신시대에 모든 것을 의심하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불신을 조장하면 그 사회는 서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병든 사회가 됩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는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육체적이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가 방탕하고 부패하게 됩니다.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파괴되어 단절이 생기고 오해와 증오심이 싹트고 결국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게 됩니다. 이렇게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 이런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바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은 좀 더 바르게 알고 싶어하는 정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회의와 의심은 진리를 찾는 자가 진리를 깨닫는 길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긴 했지만, 그는 아주 솔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보면, 사람들은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도 많습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으면서도 있는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도마는 정직하고 솔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도마는 체험적인 신앙을 원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본 이상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바로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손가락으로 못자국을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의 확신을 갖고 싶었습니다.
      체험적 신앙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기초가 없는 집과 같아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교회를 잘 알고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믿음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 체험이 없는 교리나 성경지식은 이단자나 배교자를 낳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지식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심령으로 주님을 만나는 체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체험을 하는 사실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마도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체험을 원했던 것입니다. 도마도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직접 듣는 체험과 기쁨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 전파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이 도마로 하여금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에 순종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심령으로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령을 받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지금 곧 떠날 것이고, 이제 앞으로는 나 대신 성령이 와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고, 너희를 인도할 것이고,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 속에 성령을 받는 체험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생활원칙이 분명하고 신앙도 확실해야 합니다. 애매한 태도는 곤란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마지근하면 토해 버리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확실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사람이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체험적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봄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체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마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받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도마를 통해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가 세상에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도마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실이란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의 저울에 달아보아서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진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말도, 행동도, 사랑도, 물건도, 겉과 속이 다릅니다.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진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아쉬운 시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다 진실합니까 ?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떳떳하게 "우리는 진실하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 경주중앙교회에 다는 사람이란 간판을 달고 삽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 양심대로 사는 사람, 선한 사람, 좋은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모습은 어떻습니까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탐욕과 정욕으로 죄악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 볼 수 있도록 부단히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보아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자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솔직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다"
      우리도 도마와 같은 이런 신앙을 마음중심에서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믿음의 보화들을 가지고서 세상에서 승리하며 위대한 복음 증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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