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 : 24∼29)
  • 조회 수: 444, 2013.06.22 21:38:51
  • 오늘은 12월 28일, 불과 사흘이면 1997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우리의 일생이 되는 까닭에, 어느 날 어느 주간 어느 달인들 중요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는 특별히 한해의 마지막 주간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것은, 이 때가 곧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기가 1년 중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착각하기 쉬운 때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해의 마무리 즉 결산을 결과의 측정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내게 손실이 있었는가 아니면 이득이 있었는지를 따져 보고, 그 결과에 따라 괴로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철저하게 손익의 결과에 얽매여 이득이 더 많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반대로 손해가 더 많으면 절망 속에서 탄식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전혀 이상스레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마무리는 결과에 대한 마무리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결산임을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안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6절∼8절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관제란 제물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온전히 제단에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주님께 부어 드렸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평생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가야 할 진리의 길을 중단 없이 달렸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삶을 살아온 바울에게 지금 주어진 결과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지에 묶인 쇠사슬이요, 로마의 토굴 감방이요, 사형 그것도 무서운 참수형이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얻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모든 것을 잃었을 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빈손이 된 것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주어진 결과만을 볼 때 얼마나 비참한 인생입니까? 한평생을 애써 살아온 결과가 그와 같이 비참하게 끝난다면, 그 높은 학문과 가문 그리고 경력을 자랑하던 바울은 절망 가운데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거나 아니면 정신병자가 되어야만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 조금도 절망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지금은 비록 쇠사슬에 묶여 토굴 속에 갇혀 있는 죄수요, 머지않아 참수형을 당할 사형수이지만, 그러나 이제 앞으로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울은 확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임박한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걸어야 할 바른 과정을 거쳐왔음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바른 과정을 걸어온 이상 자신의 현실이 비록 비참하다 할지라도 마지막 결과를 반드시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임을 바울은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바울의 신앙의 실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시 말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알고 바르게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르게 믿지 못했더라면, 그 역시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만 연연하여 거쳐야 할 바른 과정을 무시해 버렸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의의 면류관이란 하나님의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어 나의 결과 아닌 하나님의 결과를 확신하면서 바른 과정을 걸었을 때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위대한 사도, 영원한 사도란 의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르게 믿어 믿는 자로써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라는 권면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지키기를 포기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면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하신 결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지 못한 채 눈앞의 결과에 집착하여 바른 과정을 소홀히 한다면, 지금 내가 태산처럼 많은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요, 그렇기에 그것은 선한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당연한 사실을 믿지 못해 낭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허다한지 알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아브라함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을 갖지 못한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자식이 없었던 그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아들이 없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고를 받아 그 집안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고, 그 아들은 당연하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 까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란 결과에만 집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의 자식을 갖기에 필요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요, 그 과정을 거칠 때 비록 생리적으로는 출산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결과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바로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법대로 여종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나 그것은 아브라함의 결과였을 뿐,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선한 마침이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마엘의 후손이된 아랍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수천년을 두고 빚어진 갈등과 불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결과 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100세 때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나님께서 명령 하셨을 때에, 이번에는 세상의 방법으로 아들을 빼돌리려 하지 않고 주저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고히 믿는 자가 되었기에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과를 책임져 주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끝까지 믿음의 과정을 지켰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시사, 이삭을 죽게 내버려두시기는커녕 아브라함과 이삭을 동시에 믿음의 조상으로 영원토록 세워 주셨습니다.

    믿음은 결과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설정한 결과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과정 속에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바른 과정을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결과가 주어지는 법이요, 그것만이 참되고 영원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건만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문들을 꼭꼭 걸어 잠군 다락방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처럼 한심한 제자들을 버리시지 않고, 오히려 측은히 여기사 그들을 친히 찾아오시어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 뜻깊은 순간에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만은 그 역사적인 현장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으려 들지를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설령 부활하셨다 할지라도 그분의 직접적 사인(死因)이 되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노라 단언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 후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신 주님께서는 그 곳에 함께 있는 도마를 발견하시고는, 도마에게 다가 가시어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도마가 요구 했던 대로 도마의 손가락으로 확인해 볼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순간 도마가 터트린 고백을 본문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우리 성경에는 서술형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은 감탄형이란 말씀은 이미 드린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도마는 이렇게 감탄의 고백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은 부활하신 주님이심에 틀림없다고만 도마가 고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난다는 것은 요즈음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긴 안목에서 볼 때 그것 자체로는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죽었다 깨어나도 언젠가는 다시 죽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86년도에 저의 어머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호흡이 완전히 멎고 이미 동공마저 풀렸습니다. 아내와 저는 어머님을 반듯하게 뉘어 드리고 눈을 감겨 드린 다음 요한복음14장 말씀을 읽고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 형제들에게 전화로 어머님의 부음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한참 뒤에 어머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언제 숨이 멎었었느냐는 듯 감쪽같이 되살아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님께서 영원히 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작년 말 어머님께서는 영영 돌아가 버리시고 말았습니다.

    만약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뵌 도마가 당신은 부활하신 주님에 틀림없다고 고백하기만 했다면 그의 고백은, 저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뛰어 온 형제들에게 어머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다고 말한 저의 증언과 틀릴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어머님에 대한 저의 고백과 달리 이렇게 감탄의 고백을 터트렸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그 순간 도마는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세상의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되심을 확인케 되었던 것입니다.

    도마의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란 이 고백이 중요할 수밖에 없음은, 이 고백과 더불어 이 순간부터 도마는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에서부터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이란 눈앞의 결과로 인해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에 연연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문들을 걸어 잠군 채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인한 이 순간부터 도마는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달려가야 할 진리의 길을 결코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 순교의 순간까지도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거쳐야 할 과정을 신실하고 바르게 거치기만 하면, 하나님 되신 주님께서 반드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임을, 그것만이 참되고 영원한 결과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의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했을 극적인, 그리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변화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1997년 12월 28일 ― 우리는 지금 올해의 벼랑 끝에 서서 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무리는 결과에 대한 결산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마무리임을 잊지 마십시다. 내가 지금 손에 수많은 열매를 움켜쥐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난 한해 동안 불의한 과정을 거쳐온 결과라면,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물거품처럼 허망한 헛된 열매요, 그것은 보다 심각한 문제의 시발점뿐임을 기억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반면 지난 1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써 선한 양심을 지니고 바른 과정을 애써 거쳐온 결과가 지금 빈손으로 나타나 있다면,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올해의 끝이 우리의 끝인 것은 아니요, 우리가 바른 과정을 거쳐온 이상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에 의한 주님의 결과로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설정한 목전의 결과에만 집착할 때 새해 역시 묵은 해의 연장이 될 수밖에 없지만,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바른 과정을 다져갈 때 새해는 정녕 하나님에 의한 새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신 까닭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한해의 벼랑 끝에 서서 많은 사람들은 결과에 대한 결산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결산은 결과에 대한 마무리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결산임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손에 많은 열매를 움켜쥐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난 한해 동안 불의한 과정을 걸어온 결과라면 그 손을 펴고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바른 길을 걸어온 결과가 지금 빈손이라면, 그 빈손에 주님께서 주님의 때에 주님의 결과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임을 믿어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믿는 주님은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분명히 믿고 계속 바른 과정을 다져가기를 중단치 아니하므로, 새해가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새해로 우리 앞에 펼쳐지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되시며 내 삶의 결과를 반드시 책임져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77 admin 223 2013.06.22
76 admin 281 2013.06.22
admin 444 2013.06.22
74 admin 337 2013.06.22
73 admin 210 2013.06.22
72 admin 317 2013.06.22
71 admin 328 2013.06.22
70 admin 251 2013.06.22
69 admin 483 2013.06.22
68 admin 412 2013.06.2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