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손과 옆구리(요 20 : 24∼29)
  • 조회 수: 282, 2013.06.22 21:39:52
  •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전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직접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못하여 겁에 질린 채 다락방 속에서 문들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포에 질린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주셨고, 배신자들인 제자들에 대한 계속적인 신뢰를 천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숨결인 성령을 불어 넣어주신 다음, 참 그리스도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지니고 있어야할 바른 의식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24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여기에서 `디두모'란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도마가 누구와 쌍둥이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쌍둥이였던 도마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그 역사적인 현장에 무슨 영문인지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제자들로 부터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들은 도마는,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혀 제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신다 할지라도,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자신의 손으로 확인 하기 전 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노라 단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있었던 일을 본문 26∼27절이 이렇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날도 문들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다시 말해 아무도 열어둔 사람이 없었지만, 지난 10월 셋째주일 살펴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방안에 나타나시어 또다시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못자국과 창자국이 뚜렷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도마에게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과연 부활하신 주님인지 아닌지 도마로 하여금 직접 손으로 확인해 보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마나 예수님이나 예수부활의 증거를 예수님의 얼굴이나 옷 혹은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흔적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 또한 고난의 상처, 아픔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때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해 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본문 28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 개역성경에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서술형으로 번역되어있지만, 원문은 서술형이 아닌 감탄형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자국을 보는 순간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고난의 흔적보다 더 분명한 부활의 증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대단히 귀중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이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께서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흔적, 아픔의 흔적, 고통의 상처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의 증거는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93년 4월 제2회 신앙 대 강좌가 열렸을 때, 강사중의 한 분이었던 이어령 교수님으로부터 `교회 밖에서 본 교회'란 제목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와 한국교인들의 모습이 비기독교인의 눈에는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웬만한 교인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은 분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종교를 택해야 할 경우가 온다면 필경 기독교를 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직 교회에 다닐 수 없는 까닭을 그 분이 본문을 들어 설명한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도마가 예수 부활의 증거로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로 도마에게 보여주셨던 것 또한 고난과 아픔의 상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할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진리 때문에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흔적과 자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집단화된 이기심, 거대한 야망 그리고 세속화된 성공주의와 출세주의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던 증거가 결단코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주십시오. 나는 그 교회 교인 되기를 고려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분의 외침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외침은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었고, 우리자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고난의 흔적, 진리의 상처를 찾아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성취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야욕뿐이었던 것입니다.

     

     

    지난달 세례를 받은 한 성도님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문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 다시 말해 신앙의 참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왕국이 있었습니다. 지혜롭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성곽을 지키는 장수 중에 무술이 뛰어나고 지혜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에 감사할 줄 알았고, 주어진 일에 항상 성실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왕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다음,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에게 칼을 버리고 갑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성곽 밖으로 나가 적을 물리치되 주어진 권세를 쓰지 말것이며, 다만 사랑으로 적을 물리 치라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세와 힘과 능력과 지혜로 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건만, 이를 사용치 말고 단지 사랑으로 적을 승복시키라 하십니다.―저는 성령에 의지합니다. 헌신은 육체적 고통이 따르고, 사랑은 스스로를 희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군병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승복하겠습니다.'

    얼마나 보배로운 깨달음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직 진리의 법, 사랑의 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법 사랑의 법으로 전쟁터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할키우고 찢기우는 등 상처자국, 고난의 자국이 생기지 않을래야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도님은 하나님의 군병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승복하여 진리의 법 사랑의 법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결단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이 영원한 부활의 참된 발판이듯이, 진리와 사랑 때문에 당하는 아픔과 고난의 상처는 참된 사랑과 생명의 터전임을 그 성도님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픔 없는 사랑이란 값싼 욕정일 뿐이요, 진통 없는 생명이란 마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희생의 아픔을 통해서만 피어나는 꽃이요, 생명은 자궁이 찢어지고 골반이 으스러지는 고통을 통해서만 출산되는 법입니다. 총과 칼을 들고 온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어도 자기 아픔과 진통 없이는, 단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참된 생명과 사랑을 심어줄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진리 때문에 아파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나의 진통이 크면 클수록, 그 상처자국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은 더 크게 역사 하여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총이나 칼, 돈이나 권력으로도 구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에덴을 이 세상 속에 복원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와 사랑 때문에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고난의 자국을 갖지않을수없고, 그 자국을 가진 자는 세상을 바로 세우는 생명의 불씨가 되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가 꽃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다 당하신 고난이 남아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다보면 고난의 자국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고, 그 고난의 자국만이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참 생명의 증표인 동시에 진정한 사랑의 표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제2회 광주 비엔날레 전시작중에 루마니아 작가 Nedko Solakov가 출품한 `나무아래 어디선가'(somewhere under the tree)란 제목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큰 전시실 천정에 땅아래에 있는 나무 뿌리들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전시실 천정이 지표면이요, 천정아래 빈 공간이 온통 흙으로 가득찬 땅속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땅위에 나무들이 한가로이 서있습니다. 그 모습만 보면 말할 수 없이 평화스러운 광경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각 나무 뿌리들은 서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엉키고 설키면서 무서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뿌리들의 처절한 다툼과 암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므로써, 실은 끊임없이 자행되는 인간들의 다툼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제 눈에는 천정에 매달린 나무뿌리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 아니 그 나무 뿌리들을 감싸고 있는 흙―대지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뿌리가 왕성해 질수록, 뿌리들의 다툼이 치열해질수록 사실은 대지의 품이 할퀴어지며 찢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대지가 그 고난이, 진통이 싫다하여 나무를 뱉어 내어버린다면 나무의 존재는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대지의 아픔과 고난과 진통이 나무에게는 생명의 자궁이 되어 나무가 싱그럽게 살아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위에 살아 숨쉬고 있는 모든 나무들은, 실은 대지의 상처자국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왜 대지가 생명일 수 있습니까? 생명의 잉태를 위해서라면 상처와 진통과 아픔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전시장의 허공, 아니 대지 속에서 우리를 품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끝없는 죄악의 수렁 속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시고 찢어지시므로 끝내 당신의 사랑과 진리의 대지 속에서 우리를 바로 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저는 또 그 전시장의 허공, 대지 속에서 우리 스스로 이루어가야할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난장판이자 전쟁판과 같은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법, 진리의 법으로 껴안으므로 우리의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된다하나, 그 상처 자국을 통해 역사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세상을 바로 세워가야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 전시장의 허공, 대지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고난의 자국 부활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할 사랑의 증표 생명의 표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사상 유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있습니다. 누구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과 진리의 법으로 이 세상을 바르게 품지 못했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임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 드립시다. 진통과 아픔이 없이는 생명의 모태가 될 수 없거늘, 우리모두 아무런 고통없이 사랑과 생명을 누리려 했던 마약중독자들이었음을 하나님께 회개 드립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할것은 부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 고난의 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보여주었던 것은 겉껍질만 복음으로 위장한 추한 욕망덩어리였음을 하나님 앞에서 자복드립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직 우리를 살리시려 고난당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을 대망하는 대강절 첫째주일을 맞이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먼저 불의와 거짓, 사치와 허영, 방종과 야욕의 미몽에서 깨어납시다. 진리와 사랑의 법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 혼란한 세상을 껴안는 생명의 대지가 됩시다. 이 민족을 진리와 정의 안에서 바로 살리기 위해 우리가 당해야만할 고난과 진통이라면 기꺼이 감수합시다. 진리의 사람임을 자처하는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세상이 진리와 정의의 사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리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할퀴어지고 찢어지면 질수록 주님께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무의 뿌리를 더욱 든든하게 하실 것임을 믿으십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우리를 통하여 이 나라를 부활케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세상사람들은 도마처럼 고백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세상을 향하여 욕망의 손만을 펼쳐 보였습니다. 세인을 향해 정욕의 몸뚱이만을 보여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비추는 진리의 빛이기는커녕, 이 사회를 이 지경으로까지 허물어지게 한 주범이었음을 이 시간 회개 드립니다.

    상처받지 않고서는, 찢어지지 않고서는, 뼈가 으스러지는 진통 없이는,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잉태될 수 없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흔적으로 인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아수라장 같은 이 세상을 품는 생명의 대지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이 나라가 당하는 어려움이, 우리 주님의 진리의 법, 사랑의 법, 생명의 법,정의의 법을 믿고 따르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오히려 이 나라에 찬란한 부활의 영광이 임하는 은총의 계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77 admin 224 2013.06.22
admin 282 2013.06.22
75 admin 444 2013.06.22
74 admin 337 2013.06.22
73 admin 210 2013.06.22
72 admin 317 2013.06.22
71 admin 328 2013.06.22
70 admin 251 2013.06.22
69 admin 483 2013.06.22
68 admin 412 2013.06.2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