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가자(고전 15:35-44)
  • 조회 수: 386, 2013.07.10 16:34:10
  •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 부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다는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요, 복음도 없었을 것이요, 천국도 없고, 우리에게 아무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누이 부활에 대해 약속하고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신병자가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고 사흘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은 착각이요 과대망상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거짓 증인이 될 것이요, 성경은 믿을 것 없는 엉터리 책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부활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도 그분같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러다가 육체의 때가 끝나는 날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합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영광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야말로 최고의 믿음입니다.  부활의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설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대감, 천국에 들어갈 기대감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 봅니다.  마치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주님 만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질문과 함께 시작합니다.

      첫째 질문은 "죽은 자가 도대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우리 몸은 썩습니다.  짐승이 먹기도 하고, 나무가 양분으로 빨아먹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형편에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답 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하시면 그것으로 끝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불가능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껜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이것을 씨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장미꽃 씨가 땅에 떨어집니다.  흙이 덮이고 썩습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뻗어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워냅니다.  왜입니까?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씨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육체의 때가 끝나면 땅에 떨어지고 흙이 덮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부활생명이 있기에 때가 되면 영광스럽게 부활하는 것입니다.  

      어떤 잡지를 보다가 "클레오파트라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시신, 이를테면 머리카락 같은 데서 유전자를 채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제하면 클레오파트라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만일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활시킬 수 없겠습니까?

      우리에겐 부활의 약속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죽음은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것입니까?

      프랑스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폐수종(폐에 물이 차는 병)에 걸렸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 죽기 싫다고 나 좀 살려내라고 고함을 치고 발악을 하다가 1980년 4월 16일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가 났다고 합니다.  “싸르트르는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토록 외쳤던 그가 왜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도, 부활의 소망도, 부활의 약속도 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늘의 본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부활의 약속과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고 오히려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팔소리와 함께 홀연히 변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몸과 같은 몸입니다.  이 몸을 입는 순간이 구원의 완성인 것입이다.

      우리는 이 몸의 실체를 다 알지 못합니다.  단지 변화된 몸이요, 영광스러운 몸이며, 축복된 몸이라고만 알 뿐입니다.  마치 번데기가 껍질을 벗고 나비로 부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번데기와 나비는 전혀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의 몸이 보잘 것 없는 장미꽃 씨라면 부활의 몸은 아름답게 핀 장미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지금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를 네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로, 지금의 몸이 썩을 것이라면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몸은 아무리 찍어 바르고 보살펴 봐야 썩을 몸일 뿐입니다.  100년을 가지 못하는 몸인 것입니다.

      둘째로, 지금의 몸이 욕된 것이라면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지금의 몸은 그다지 영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셋째로, 지금의 몸은 약한 것이고 부활의 몸은 강한 몸입니다.  세상에 웬 병이 그렇게 많습니까?  나이가 조금만 들면 얼마나 병과 고통에 많이 시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도하다가 노인분들 보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렇다고 나을 소망도 없습니다.  죽어야나 나을 병들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이 무슨 힘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넷째로, 지금의 몸이 육의 몸이라면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몸인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최고의 소망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비밀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인생의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자입니다.

      이 비밀을 말씀하면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58절).

      첫째로 믿음에 견고하게 서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새소망교회 성도들이 과연 이렇게 부활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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