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승리(고전15:50-58)
  • 조회 수: 368, 2013.07.10 16:42:47
  • 1999년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죽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영광스럽고 
    감격에 찬 생명의 새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되새기는 
    감격의 새아침! 부활 생명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부활에 보면 땅속에서 연한 새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돌을 깔고, 나오는 풀을 뽑아내도 그 풀의 생명은 다시 사나니, 
    생명의 힘을 막을 자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자연계와 생태 
    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부활을 계시하십니다. 
    오물통 속에 있던 구더기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 날아다닙니다. 
    굼벵이가 땅속에서 7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매미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며 사는 것을 볼 때 부활의 신비를 느낍니다.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입니까?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닮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는 없습니다. 다만 사실이 엄연히 존재할 뿐입니다.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신비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없어진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아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다. 
    생명이 떠나가는 것이다. 생명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떠나가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변화 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죽음의 신비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생각하여야할 문제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스스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죽음의 신비는 
    존재합니다. 부활생명도 확실한 것입니다. 부활사건을 특수한 기적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신비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이적도 없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역사가 하나님께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여겨지고 깜짝 놀랄 일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이적이란 없습니다.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만이 안다 모른다,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이적이요 
    기적이다, 놀랍다 할뿐이지 하나님께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설명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적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 자체를 설명하고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싹을 한번 보십시오. 
    다 죽은 것 같은 동토(凍土)에서 움이 돋아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원래 
    조그마한 유충(幼蟲)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버러지였던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인간의 최후의 적은 죽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인 것입니다 

    생명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없던 생명이 태어났고 그 생명이 
    성장하다가 죽게됩니다. 그 다음 단계로 부활 이라고 하는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실이고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의 생명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의 총주제, 
    성경이 말씀하는 총주제는 하나님 나라 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복음 전파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두 번째 총주제는 십자가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 
    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제자들은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세 번째 총주제는 예수 부활 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십자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방향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부활신앙 안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제자들은 
    이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저들은 비로소 용기를 얻었습니다. 확신의 사람들이 됩니다. 
    환희의 사람들이 됩니다. 특별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시던 바로 그 법정에도 설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부활의 아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와 율법과 심판을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 안에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큰 생명의 빛 안에서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죽음은 잠깐이요, 
    하나의 과정이요, 하나의 필연일 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분이 부활신앙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比辭)를 
    말해주었습니다. 모태(母胎)는 세태(世胎)다 라고 말입니다.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근심걱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출생이 모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더운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탯줄을 끊어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출생했다고 기뻐 해주지만 실은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태-세상이라는 태(胎) 속에 
    있습니다. 언제건 그 탯줄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될 때,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엄연한 생명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군인도, 가룟 유다도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활 앞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부활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다 소화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곧 내가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적 변화가 
    아닙니다. 한낱 자연현상이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요, 변화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죄와 율법과 사망을 다 이길 수 있고도 넉넉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이며,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이며, 미움과 저주와 분노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며,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루프스 모셀리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단 한번도 장례식을 집례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만이 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도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그를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젊은 아들도 관에 손을 얹고 
    말씀 한 마디고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로부터 나오며 그로 말미암아 
    기동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되면 싹이 나는 것도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는 것도 모두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승리합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을 
    정복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어떤 죽음도 패배가 아닙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나라에 가는 관문일 뿐이며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준비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에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봄에 자라는 나무 잎마다 쓰셨다 고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안에서 성취될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활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들어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즘 환경 오염 문제가 심각합니다. 
    보통 흙 한 스푼에도 미생물이 대충 1억 6천만 개나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미생물이 있어야 땅이 기름집니다. 
    물 한 스푼에도 수천만 개의 미생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물 즉 생수로서 식수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런 땅과 물이 오염되어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연이 오염되고, 썩고 있는 것을 방지하고, 
    생명 있는 물, 생명 있는 땅, 생명 있는 공기를 가꾸어 가는 것도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라는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생활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생활에서 부활의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생명과 연결된 일이기에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모든 신앙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바로 너희 수고가 부활신앙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진정한 삶의 의미가 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실을 영원으로, 고통을 평안으로,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그리고 순간의 삶을 영생으로 이르게 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나의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겠습니다. 

    뜻깊은 1999년 부활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승리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oseporn.com

    2021.04.11 07:06

    A片
    부활절 설교자료 - 부활의 승리(고전15:50-58)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37 admin 401 2013.07.10
136 admin 217 2013.07.10
admin 368 2013.07.10
134 admin 3859 2013.07.10
133 admin 256 2013.07.10
132 admin 165 2013.07.10
131 admin 276 2013.07.10
130 admin 300 2013.07.10
129 admin 581 2013.07.10
128 admin 386 2013.07.10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