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몸(고전15:42-58)
  • 조회 수: 276, 2013.07.10 16:37:35
  • 어느 가족에게 국민학교 1학년짜리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의 전 가족이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이 지난 며칠 후에 가족들이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는데 이 아이가 공동묘지(Cemetery)를 보더니 소리를 지릅니다. 
     "저기가 사람을 심는 곳이야(That's where they plant people)."
     원래 공동묘지를 설명한다면 '묻는 곳'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
    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묻는다(bury)' 대신에 '심는다(plant)'라고 말함으로서 공동묘지에 대한 관
    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후에 이 아이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진 모릅니다만 이 아이의 삶을 우리는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아마도 자신이 언젠가는 plant 될 것을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안 생각하는 것은 "나도 언젠가는 묻힌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묻히기 전
    에 못다 이룰 것을 이루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자기가 '심긴다'고 생각하면 사는 양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꽃
    피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꽃피울 생각을 하면서 살게 될 줄 압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사는 삶을 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한 그룹은 무덤을 묻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그룹은 무덤을 심기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언젠가 묻힐 생각을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아니
    면 언젠가 심길 생각을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니면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2,000년 전에 주님께서 무덤의 개념을 뒤바꾸어 놓은 
    것을 고백하면서 이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서 무덤을 묻히는 곳이 아니라 심기우
    는 곳이 되었음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무덤은 묻히는 곳이 아니라 심기우는 곳임을 그 어느 곳보다도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먼저 사도바울은 심겨질 우리의 육의 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이라
    고 표현합니다. 이에 이러한 육의 몸이 심겨지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데 신령한 몸은 썩지 
    않을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썩을, 욕된, 약한 육의 몸이 심겨지면 죽음을 통하여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강한, 
    신령한 몸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주님도 이 땅 위에서 썩어질 욕된 연약한 육의 몸을 가지셨다
    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셨는데 부활후 주님은 썩지 않
    을 영광스러운, 강한, 신령한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어떻게 주님이 욕된 몸을 입으셨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썩어질, 그리고 약한 육의 몸을 갖고 계셨던 것을 수긍하실 줄 압니다. 예수님의 몸은 연약하셔
    서 채찍에 맞으실 때 찢어지셔야 했고 창으로 허리를 찌를때 심장까지 창이 파고 들어가셨던 것
    을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면 왜 주님의 몸이 욕된 몸이었을까요? 주님의 몸은 인간들의 죄로 
    인하여 욕된 몸으로 변화되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사랑하사 인간들을 만지셨습니다. 중풍병자, 문둥병자 모두를 만지셨습니다. 죄
    있는 인간의 욕된 요소가 주님의 육의 몸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죄에 오염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욕된 것이 주님의 육의 몸에 침투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이것을 잘 증명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 받은 자다"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곧 나무에 달린 자마다 욕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저주의 십자가는 예수님
    을 욕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어 달림을 통해서 욕된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곧 
    주님은 썩어질, 욕된, 약한 육의 몸을 입으신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이 왕노릇하는 곳에 육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인간들과 함께 죽어가신 것입니
    다. 그런데 죽음이 마지막이었을까요? 
     열대지방에 가면 우파스(Upas)라는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독한 나무인데 혼자서 
    그 땅을 차지하려고 여러방식으로 다른 나무들을 해치는 나무입니다. 그 땅에 다른 나무가 자라
    지 못하도록 햇빛을 가리려고 무수한 잎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나무에게 물기를 안 뺐기려고 
    나무 밑에 많은 뿌리를 엉켜 놓고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나무 잎에 독이 있어서 나무 잎이 떨어지면 그 어떤 새싹도 자라나지 못하
    게 합니다. 
     이 우파스 나무는 바로 온 세상에 임하는 죽음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이 땅 위에 임
    했을 때 모든 것이 죽어 갔습니다. 썩어짐과 욕됨과 약함 밖에 그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죽
    음이라는 나무 밑에서 모든 것은 묻혀 갔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썩을 몸과 욕된 몸, 약한 몸을 입
    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나무 밑에, 우파스 나무 밑에 묻히셨습니다. 
    12 제자를 비롯하여 모든 주님을 따른 자들이 주님이 묻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죽음 
    앞에서, 우파스 나무 밑에서 한갖 연약한 썩어질 욕된 몸을 입고 계셨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에 모든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3일후 우파스 나무 밑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나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무는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강한, 신령한 몸을 입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나무 밑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나무는 급해서 독이 있
    는 나무잎을 마구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생명의 나무는 더욱 거세게 자라 올라갑니다. 
    드디어 우파스 나무 보다 훨씬 우뚝선 나무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 우뚝선 부활의 나무, 생명의 
    나무로 인해 우파스 나무는, 죽음의 나무는 어느덧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우파스 나무는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죽음의 권세라고 생각이 됩니다. 인간 세상의 죄가 들
    어온 이래 모든 인간은 죽음의 공포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죽음은 묻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몸소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죽은신 후 부활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 왕노
    릇하는 세상이 아니라 생명이 왕노릇하는 세상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와같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본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
    이 어디있느냐"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전세계가 기뻐하는 이유는 온 세상에 죽음을 가져오고 있는 우파스 나
    무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에 대한 조롱이 온 우주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동안 사망이 우리를 조롱하지 않았습니까? 사망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지 않았습
    니까? 사망이 우리들에게 조롱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이제 
    세상은 뒤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망이 조롱을 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온 세계에서 사망이 왕노릇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온세
    계는 사망을 조소하고 있습니다. 오늘 온 세계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는 부활의 노래는 곧 사
    망에 대한 조소의 노래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사망에게 조롱의 노
    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신령한 몸으로 살 것을 바라보며 마음껏 사망에게 조
    롱의 노래를 퍼붓는 것입니다. 
     이번주간 열심히 부활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사망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십시다. 그런데 노래
    만 부르고 있으면 될까요? 
     사도 바울은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도바울은 부활을 믿는 교우들에게 신령한 몸을 입기까지 육의 몸을 가지고 견고하며 흔들리
    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아울러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을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처럼 간곡하게 권면하는 이유는 성도들에게 먼 부활을 먼저 내다보기전 주어진 
    육의 삶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썩어짐과 욕됨과 약함의 길에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우파스 나
    무 밑에서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노래는 환상의 노래가 아닙니다. 부활의 노래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바로 보게 합니
    다. 우파스 나무 밑에서의 삶을 바로 보게 합니다. 우파스 나무 밑에서 우파스 나무를 조롱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부활의 주님도 죽음의 나무를 쓰러 뜨리기 위하여 먼저 죽음의 나무 밑에서 충실
    하셨습니다. 썩어짐과 욕됨과 약함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로인해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죽음을 이기시기 위해 다른 것을 하
    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파스 나무 밑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
    후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 자체에 죽음을 이기는 위대한 힘이 있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아이러니칼한 삶이 주어지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의 죽음에는 죽음을 이기는 힘이 있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죽음은 오직 주님만 소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죽음은 전혀 아무런 힘이 없을까요? 우
    리들의 썩어짐과 욕됨과 약함에는 아무런 힘이 없을까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라는 권면을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파스 나무 밑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우리의 죽음과 썩어짐에도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에게는 부활의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우파
    스 나무 밑에서 충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의 길을 가야합니다. 우리의 죽음과 썩어짐
    을 통하여 오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찬들의 문제는 자신은 죽지 않고 부활의 노래만 부르려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죽
    음만을 조롱하려 합니다. 자기는 죽지 않고 입으로만 부활의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그러기에 그 
    노래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권고하는 뜻은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가는데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썩어져가는 삶에, 주님을 위하여 욕된 삶을 사는데, 약해지는 
    삶을 사는데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음의 나무 밑에서 죽음을 조롱하면서 살라는 뜻
    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부활의 노래를 부르십니까? 또한 썩어
    져 가는 죽음의 길에 충실하십니까?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언젠가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챨리 폴리니(Charle Poliny)라는 미국 군목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마지막 인
    사를 나누고는  다시 군대로 복귀할 때였습니다. 챨리 폴리니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가 군
    복무를 잘하게 기도해 주세요."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몸 하나 안다치고 집으로 오게 되기를 기도하련다."
     챨리 폴리니가 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내가 어디 있던 그곳에서 충성하게 해 달
    라고 기도해 주세요."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챨리 폴리니는 자기가 탄 군함이 침몰할 때 다른 군목과 
    함께 그들의 구명조끼를 다른 군인에게 줍니다. 그리고 배와 함께 물 속에 가라 않습니다. 물 속
    에 심기워진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노래를 부르면서 죽어 갔습니다. 썩어져 갔습니다. 그가 구명조끼를 다른 군인에
    게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챨리 폴리니는 언젠가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강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닷속에 심겨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허락하시려고 주님은 오늘 아침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다함께 부활의 노래, 죽음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십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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