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 저 너머의 산(고전15:12-15)
  • 조회 수: 667, 2013.07.10 07:50:31
  • 나이가 들면 여러 면에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눈이 침침해지고 소화가 잘 안되며 생각이 잘 돌아가지 못하여 잊어 먹는 일이 많아집니다. 건강이 약해지며 마음도 약해 져서 그런지 서운한 것이 많아집니다. 자주 서글퍼집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나이 들어서 슬픈 것만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에 겪는 문제들은 거의가 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심리적인 반응들이 원인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내세의 소망을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잔잔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모든 것이 다 밝혀 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1. 그러면 죽음이 주는 은혜가 무엇이며 내세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1) 죽음은 인간으로 겸손케 합니다. 
      천 없는 영광과 권세자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차대전시 일본 천황이 자기가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자탄의 죽음 앞에서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방송을 하고서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협정을 맺으려는 천황에게 맥아더가 말하기를 "당신이 신이라고 하니 나는 사람인고로 신과는 협정을 맺을 수가 없다"고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가 교만해 집니까? 자기 죽을 줄 모르고 까부는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 욥기서에 의하면 하룻 밤사이에 엎어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누가 겸손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죽음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부자는 자식 대대로 부자가 되고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식 대대로 이어서 그 힘을 가지고 장난질 칩니다. 힘을 가진 자는 가진 것으로 거만하고 자랑하고 교만하며 어떻게 하던지 그것들을 오래도록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떠나 보내어야 합니다. 두 손을 다 펴놓고 떠나가야 됩니다. 그 부를 다른 이로 하여금 가지게 만들고 그 자리에 다른 이로 앉게 만들고 공평하게 만드시는 것이 죽음입니다.

      (3)죽음은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있는 마지막 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전에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2. 그러면 이 같은 죽음을 건너서 저 너머에 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1) 인간의 본능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전3:11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여기만의 삶만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서의 삶과 태어나서 이 세상의 삶이 다른 것처럼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을 사모하는 영생에 대한 본능은 누가 주신 것이며 그것을 만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았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계시니까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햇빛이 있으니 나무나 풀이 자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런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영적 기갈이 있으며 영원히 살고 싶은 본능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2) 자연적인 원리입니다.
      씨앗을 보면 땅에 심으면 곧 죽을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도토리가 떨어졌지만 죽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자기 둘레에 무덤을 짓고있는 애벌레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나비의 색깔과 생명력을 가지고 껍질을 깨고 태어납니다.

      (3) 철학적인 면에서
      칸트라는 철학자는 사람들은 윤리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윤리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 그 윤리의 근거가 정의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이 세상에서는  윤리 곧 정의가 항상 온전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만 간에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는 심판자에 의하여 내세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4)죽음을 가까이 갔던 경험들을 보면 압니다.
      우리 교회 어느 권사님의 친정 아버지는 몸이 불편한 중에 누워서 자식들을 불러놓고 찬송을 부르게 하고서는 내일 오후 2시에 세상을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2시 전에 목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린 후 오후 2시 정각에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김활란 박사는 죽을 때 둘러선 후배 교수들에게 "저기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 백 말을 타고 오신다. 나를 위하여서는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찬송을 불러다오"라고 말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안양에서 모셨던 정경태 장로님의 아버님도 장로였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실 때 밤중에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는데 지붕위로 환한 빛이 쫙 하고 올라가는 것을 자기도 보고 동네 사람들도 다 보았다고 간증했습니다. 미국에서만 8백만명에 이르는 분들이 죽음 가까이 갔다가 왔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것은 그 반대편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커네티컷 대학의 기어슨 교수가 이런 종류의 죽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러한 경험은 이들로 하여금 이전과 다르게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관심이 아니라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그리고 섬김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5)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생이 무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도덕이 무슨 소용이 있으면 정의가 어디에 존재하느냐는 물음입니다.

      (6)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① 죽음 후에는 곧 바로 부활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 값을 담당하실 때 한편의 강도가 구원과 영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행24:15에도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② 부활 후에 예정된 것이 심판입니다.
      히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함에 따라서 하시는 심판이 있습니다. 지금 보상을 다 받지 못한다고 이 땅에서 다 위로 받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님께서 냉수 한 그릇까지의 섬김과 봉사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제한이 많습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 너머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히 찬양의 삶이 예비되었습니다. 이후로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이웃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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