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을 믿으신다면(고전 15:29-34)
  • 조회 수: 276, 2013.07.10 16:32:38
  • 서론 

    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은 전쟁 고아들을 위해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연합군이 아이들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곳에서 지극한 돌봄을 받고 최상의 음식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음식도 잘 먹고 잘 지내는데 밤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당황한 수용소의 장교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몇몇 심리학자들에게 그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원인을 조사하던 학자들은 마침내 한 가지 해결책에 찾아냈습니다. 다음날부터 매일 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침대 사이로 한 사람이 다니면서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밤 작은 손에 빵을 하나씩 쥐고 하루하루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며칠이 안되어 아이들은 밤새도록 깊은 잠을 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낮 동안에 충분히 음식을 먹을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염려와 불안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오늘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 해도 내일에 대한 기약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즐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손에 빵조각을 들려주자 마음 속의 불안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다음날 아침식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고, 내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망이 있는 사람과 소망이 없는 사람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민족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과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있는 사람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마치 수용소의 아이들과 같이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일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망을 잃은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막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사회가 "막가파"로 인해 떠들석했던 적이 있는데, 그러한 막가파가 생기는 것은 그들에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소망이 있을 때 사람은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의 접근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소망의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한 분 만의 부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ex)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썬다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대학교수가 그에게 질문하기를 "당신은 오랫동안 힌두교의 전통에 젖어 있었는데,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썬다싱은 대답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회가 과학화될수록 논리와 실증을 중시합니다만,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이며, 이 부활신앙 위에 우리의 믿음이 뿌리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정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30-31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을 재구성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가 부활할 것이기에, 날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는 수많은 위기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31절에서 바울이 자신의 삶을 가리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표현한 것은 날마다 목숨을 건 삶을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성 위에서 밧줄을 타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파선을 당하여 죽을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을 당할뻔 하기도 했습니다. 32절에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에베소에서는 맹수(맹수와 같은 박해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자신과 모든 믿는 사람들이 다시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위협과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느냐고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와 같이 조직적인 핍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목숨을 걸고 선교 현장에 나갈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시대에 주님을 위해 짊어져야 할 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함으로 편안함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영적 문제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 시대에 우리들 각자의 자리에 서 있다면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 어제 아침 새벽기도회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경 누가복음은 그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70명으로 구성된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회의 모든 의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에 찬성하고 앞장섰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신 후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 묘지로 쓰려고 파 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스스로 동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요셉은 이 일로 인하여 동료 의원들에게 따돌림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삶을 택하였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ex) 어제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아주 좋은 간증을 하나 들었습니다. 경향교회에 어느 장로님이 계신데 그 분이 목욕탕을 개업하시게 되었답니다. 목사님에게 개업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했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주일날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개업예배를 인도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석원태 목사님이라고 고신측 교단의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도 믿음이 좋았던지 주일에는 절대 목욕탕 문을 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답니다. 그런데 목욕탕을 하다보니 점점 적자가 나고 다 망하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주일에는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수도요금을 내지 못하여 수도가 끊겼습니다. 목욕탕에 수도가 끊겼으니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그래도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았답니다. 할 수 없이 이제는 지하수를 끌어 쓰려고 땅에 파이프를 박고 관정을 뚫었는데 그곳에서 온천이 솟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목욕탕 물이 좋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주일난 꼬박꼬박 문을 닫아도 손님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많은 돈을 벌고 이번에 교회를 건축하는데 혼자 수억원인지 수십억원을 헌금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만하면 하나님께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축복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오직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불편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것 때문에 고난과 희생과 위험을 감수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의 삶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도 바울을 그냥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비록 육신적으로 편안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전 세계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순간의 쾌락주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32절 하반절-33절). 

    서두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사람이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허무주의에 빠지든지 쾌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내일 죽을텐데 오늘 열심히 공부하거나 열심히 일한들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허무감이 극에 달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고, 죽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쾌락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 한 번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처럼 무서운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전 15장 12-13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고,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지금도 태반이나 살아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논리에 속지 마십시오. 쾌락에 젖어 되는 대로 살지 말고, 자신의 경건한 삶을 스스로 지키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고난과 희생도 감수한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신앙적 삶의 모습을 모범으로 삼으십시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은 여러분을 싫어하고 조롱할지도 모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위 [왕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여러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분명하다면 그 길을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ex) 2주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대학에 입학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입니다. 예배 후에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오후에 있는 청년부 성경공부에 참여하라고 권면을 하였더니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오후에 신입생 환영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술집에 모여서 파티를 벌이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형제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주일에 술집에 가서 신입생 환영회를 갖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하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얘기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 서야 할 자리와 서지 말아야 할 자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그 신앙은 무너지는 것이며, 어떻게 하면 담대하게 그런 일에 대처할 수 있는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면 하나님은 반드시 책임져 주시는 분인데, 선택은 네가 하라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단지 목회자로서 전하고 가르쳐야 할 바를 다했으니 가부간에 선택은 형제가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져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청년부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 청년이 참석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마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속삭임에 속지 마시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깨어 의를 행하되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34절).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깨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쓰이고 있는 "깬다"는 말은 원래 술에 취한 데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히 신자의 부활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방탕한 삶을 살았고, 정신적으로도 늘 술에 취한 자와 같이 몽롱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그런 상태에서 단번에 깨어나고 이제는 더 이상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은 늘 우리에게 술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부지 중에 세상 술을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양주나 소주나 맥주만이 술이 아닙니다. TV나 영화, 스포츠나 소설, 심지어 친구나 친척도 우리의 영혼을 잠재우는 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 예를 들면 TV를 보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지난 해 말에 전국 소비자 의식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TV 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3시간 8분으로 나왔습니다. 평균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루 3시간 이상을 텔레비젼 앞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믿는 사람들도 다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물론 TV를 본다고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일부만이라도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른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영적으로 유익하도록 잘 사용하면 득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늘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속아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리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죄를 짓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34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사건과 환경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시로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졌다면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 바가 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부활주일입니다. 그러나 기념식으로 부활 축하예배를 한 번 드린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전주곡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는 소망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빵 한 조각씩 들고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잠을 이루는 아이들처럼 참 기쁨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그리고 내가 가진 신앙 때문에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간의 쾌락주의에 속아 자신의 행실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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