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부활(고전15:12-18)
  • 조회 수: 213, 2013.07.10 07:51:40
  • 장례집에 가면 우리 예법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목사는 오늘 김용근 권사님과 같이 그야말로 "드릴말 없는,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대해서도 적어도 7-8차례 예배하고 설교를 해야되니 제 가슴도 주체를 못하겠는데 정말 가슴이 메어질듯합니다. 어느놈이 예배할 때 마다 목사가 설교하게 해놓았는지...

    오늘 역시 우리 교우들 모두가 가슴에 큰 충격을 앉고 이 예배를 드리고 있고 또 김권사님의 죽음에 대한 주제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죽음에 대한 생각 몇가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지난 주까지만 하더라도 공동의회에서 재정보고를 해주시고 새로되신 재정부장님께 모든 서류와 장부, 그리고 작업하던 컴퓨터까지 교회에 기증을 하신 권사님께서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정리하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도 갖게됩니다. 지난 주 감사를 선출했는데 경선이 되어 김권사님이 당선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혹시 섭섭해 하시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저에게 권사님께서는 "목사님, 참 잘됐습니다. 직전 재정부장이 새 재정부장을 돕고 조언을 해야 할 것인데 감사가 되어 지적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 얼마나 민망합니까? 제가 않된 것이 참 잘된 일입니다."라며 제게 안심을 시켜 주셨습니다.

    매 주일 변함없이 가운데 줄 4-5번째 자리에 앉아 예배 보시던 그 자리에 앉아서 권사님에 대한 생각에 잠겨보았습니다. 목사는 뭐니뭐니해도 매 주일 자리를 지켜주는 교인이 가장 소중한 법인데 매주 변함없이 권사님의 몫이던 이 자리를 이젠 누가 채워준단 말입니까? 지각하는 교우들이 많아 시작하기가 민망할 때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권사님은 이 자리를 지켜 주셨지요.

    너무나 뜻밖의 죽음입니다. 지난 화요일 자기발로 병원에 걸어들어가 바로 뇌출혈을 일으켜 병원 내에서 사망하시기까지 불과 몇일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 사랑스럽던 김권사님의 함자 앞에 고인이라는 '고'자를 붙여야합니다. 그 경황 중에도 그는 평소의 권사님의 소원대로 장기를 기증하셨고 그로 인해 6명이 새생명을 갖게 되었으니 참 죽고 사는 일이 묘할 뿐입니다. 권사님의 이 갑작스런 죽음을 보면서 몇가지가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즉 내 앞에 보장되어 있는 삶이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고 바로 우리 옆에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순간들은 그 시간이 별로 길지 않다는 것이 믿기 싫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할 때, 우리가 살아있는 이 짧은 순간들은 한 순간이라도 욕되게 할 수 없는 신성한 순간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바로잡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어느시간에 우리 삶을 정리 하더라도 여한이 없고 후회가 없는 삶이어야 합니다. 긴 시간이 우리 앞에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사는 것은 은혜로 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삶이 당연한 나이 몫이 아닙니다. 언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그 앞에 서야합니다. 지금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게 허락하신 시간들은 특별한 은총의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삶을 우리의 몫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부, 우리의 명예를 주십사고 간구하고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오늘 나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 오늘 나의 호흡이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만약.. 가정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하루전에 숨이 끊어졌다고 가장합시다. "아, 이것은 꼭 했어야 하는데... 이말은 꼭 전해주었어야 하는데... 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일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김권사님의 죽음을 보면서 "참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오랜 실직과 경제적 고통, 마지막에 그의 건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굳은 일들을 하시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만약 그 나라가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도 헛되고 우리가 갖는 소망도 헛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의롭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세상을 보십시오, 악하고 약삭 빠른 처세술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출세하고 남을 누르고 착취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떵떵거리며 잘 사는 일이 허다하지 않습니까? 권사님 처럼 가난하지만 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이렇게 요절하는 것으로 세상이 끝나버린다면 그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면, 이세상의 전부라면,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가 만약 없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소망도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은 분이거나 이 세상을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만약 그 예비하신 세상에서 이 억울한 질서들이 뒤집혀지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그 행위대로 심판받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새로운 세계를 예비해 놓으셨을 것을 확신합니다.

    만약 보이는 이 세계가 우리의 전부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편하게 마음껏 즐기며 살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남을 등쳐서라도 모아야 할 것이며 남을 밟고라도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무슨 성인 군자라고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데 남에게 베풀고 양보하며 살겠습니까? 그 나라에 대한 약속과 소망은 막연히 하늘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죽음은 관계절단입니다. 우리 인간이 맺는 관게는 아무리 백년 천년을 함께 살자고 맹세를 하더라도, 피를 나눈 천륜이라도 반드시 한번은 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관계의 절단이 바로 죽음입니다. 김권사님은 살아 있어서도 이미 죽음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부모는 김권사님께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나가 예수 믿는다고 박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의 가족과 의절상태 가깝게 지냈고 믿지 않는 가족들이 그를 따돌렸습니다. 권사님께서 말년에 그렇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셨는데 그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송파가 개발되자 떼부자가 되어버린 분이었습니다. 저는 김권사님이 혼자인 줄 알았는데 상을 당하고 보니 그의 형제가 아주 많았습니다. 더욱이 재산의 상속 문제로 형제들이 장남을 경계하였고 종교의 차이는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지키기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권사님은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게다가 오랜 실직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상실, 여기저기 인사 못하고 때가 되도 오가는게 없으면 우리 사회에서는 금방 손가락질 받고 따돌림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따듯하게 못해드려 지금 아쉬운 마음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권사님에게는 교회가 유일한 의지할 곳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권사님은 내게 여러번 자신이 헌금을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말씀 하셨습니다. 재정부장으로서 남에게 헌금을 독려하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은 헌금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말하셨습니다. 여러번 그만 두었으면 하는 의사를 말씀 하셨고 제가 걱정하시지 말라고 했지만 그점 몹시 힘들어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교회에는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우들도 혹시 만의 하나 그런 것 가지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매주 정한 헌금을 드리는 믿음도 크지만 없어도 매주 교회에 나올 수 있는 용기는 더 큰 믿음 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무릎쓰고 순간순간의 민망함을 이기며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 분들이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배려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화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을 때 우리는 각각 다른 점들로 부딪히기 쉽습니다. 저사람 나와 성격이 달라. 나와는 사상이 달라.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더 크게 확대해서 염려하고 기회만 있으면 그를 규정지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가 내게 화를 입히지 않을까, 공격적이지 않을까하는 염려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런 염려에서 우리는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항시 싸울 준비를 갖춥니다. 그런데 죽음은 더 이상 그가 내게 공격을 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내가 그에게 붙이는 말을 듣고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으며, 나의 모든 공격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온 것입니다. 아무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계속 공격적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기준 이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않좋던 사이도 죽음 앞에선 풀어지고 화해하는 것이며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큰 용서의 장이요 화해의 장입니다. 여러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때로는 나와 너를 죽음 앞에, 아무런 저항도 반응도 할 수 없게된 상태에 대입시켜 보십시오. 서로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받는 고통에서 치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죽음은 해방이라고 봅니다. 살아서 눈물 흘리던 사람, 아프고 쓰라린 고통을 겪은 사람, 여기서 병들었던 사람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시는 눈물없고, 다시는 고통도 없고, 다시는 병들지도 않는 그곳으로 부르시는 것이니까요. 죽음은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모든 질곡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고 비로소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진정한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죽음은 마지막 원수라고 합니다. 왜 죽음이 마지막 원수입니까?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세력에서 거져 줄꼬?"라고 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적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두가지 적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중에도 죽음은 최후의 적으로, 마지막 원수로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살지 못합니까? 그 배후에는 죽음이란 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최후의 적이고, 또한 최대의 적입니다.

    이 세상의 압제자들은 항상 이점을 이용합니다. 그들은 죽음을 담보로 인간을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옥에 가두고, 폭행합니다. 때로는 경제적 봉쇄를 통해, 실직의 두려움을 통해, 생업을 위협하고 생존권을 박탈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 생명을 담보로해서 협박함으로 우리를 비겁하게 만들고 굴종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담보로 한 압제자들의 위협에 대해서 바울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아,네 승리가 어디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갔느냐?"고 외칩니다. 이것은 "더이상 죽음이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 "우리는 죽더라도 비겁해지지 않는다" 는 승리의 외침입니다. 부활은 이러한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왜소해 지게 하고 우리를 비겁하게 만드는 위협-어떤 형태를 띄던 결국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담보로 우리를 굴복 시키려는 세력에 대해 "나는 아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그 굴종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외치는 것이며 그 죽음의 위협에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식의 홀 로서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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