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가 쓰시겠다 하라(눅 19:28-40) [고난주간]
  • 2013.09.01 21:27:10
  • 본문은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장면입니다. 그 날이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왕이 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라고 환호하면서 왕의 신분에 맞는 기대와 환영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았고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도 부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종려주일을 맞아야 합니까? 

    1. 우리는 먼저 그 날의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사 9:6에 예언하기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마태는 그가 왕의 족보에서 태어나신 유대인의 왕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왕들을 지으신 왕중의 왕이신 분이요, 왕으로 오신다고 예언되었던 분이며, 왕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셨고,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되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왕이 되고자 하셨다면 곧바로 왕권을 인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영 죽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고 영원한 왕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왕은 왕인데 백성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 왕] 이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고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자기민족이 당하는 설음과 고통을 보셨기에 그 나라의 왕이 되어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올라간 김에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왕이 되어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유대인의 독립을 이루어 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죄인들 대신에 죽어 만민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인가? 주님은 주말이 다가오는 목요일 밤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목요일 밤에 기도로 결정하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면서 측근 제자들에게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심정을 털어 놓으셨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간구 하신것을 보아서 그 주간 첫날인 종려주일에 가졌던 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짐으로서 인류를 구하는 것이 자비의 하나님의 결정이었고 예수님은 그 결정을 받아들여 이 땅에 오셨지만, 그 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깊이 번민이 되셨던 것입니다. 만일 십자가를 포기하시면 인생들은 영영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장 악독하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이나 죽이는 사형들에 매달려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극심히 고민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마 지옥이라는 데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셨습니까? 지옥이란 사람들을 선하게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지어낸 가상의 장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없다면 왜 주님이 그런 번민을 하셨겠습니까? 지옥이 없다면 그것을 가장 정확히 아실 분이 주님 이신데, 그가 왜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할 만큼 번민하시며 밤 새워 핏방울처럼 맺히는 땀을 흘려가며 기도하셨고 결국은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을까요? 있지도 않은 지옥을 있는 것처럼 꾸미려고 영광스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셨을까요? 지옥이 없으면 주님의 고민이 없고 고난도 십자가도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꼼짝없이 지옥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방법이 당신이 죽으시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번민하시며 그 길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지옥을 두려워합시다. 그리고 그 영원한 불 못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뿐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권세까지 주신 주님께 마음과 물질과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고난주간에 먼저 해야할 일은 주님 고난의 이유와 주님의 번민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나의 권익을 가로챈 사람을 용서해야 하나 하고 밤 새워 고민하다가 마침내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그런 거룩한 번민이 이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는 고난주간이 됩시다. 

    2. 주가 쓰시겠다 하라 는 말씀에 답을 드립시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다가 베다니와 벳바게 라는 동네를 지나실 때였습니다. 주님은 두 제자를 불러 "건너편 마을로 가면 나귀새끼가 어머와 함께 매인 것을 발견하게 될 테니 그 나귀 새끼를 끌고 오너라, 만일 남의 나귀를 왜 끌어가느냐 고 항의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해라 그러면 나귀를 주리라" 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가 말씀하신 동네에 가서 나귀를 만나서 끌고 오려니까 주인이 항의하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려 하신다" 고 말하자 주인이 두말없이 내어 주었습니다. 
    주님은 왜 하필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을까요? 그는 왕이십니다. 그가 왕의 도성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왕의 입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을 권력으로 통치하러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을 위해 희생물이 되러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을 타고 도도하게 들어가실 것이 아니라 농사에나 쓰는 나귀를 택하여 타신 것입니다. 왕 중의 왕이 종들을 위해 멸시와 죽임을 당하려 가십니다. 생명을 주신 이가 죽을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러 가시는 길입니다. 그 발길이 가벼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준 것이 새끼 나귀였습니다. 

    나의 죄짐을 대신 지고 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조금 가볍게 해 드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심정을 알아드리는 것이요, 그의 죽으심에 보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왕권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셨던 그날의 결정이 참으로 잘 하였다고 생각하시도록 내가 그 열매로서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내가 그날 그 일 하기를 잘 했다. 내가 저들을 위해 죽기를 잘 하였다. 저 사람들이 새사람으로 변했지 않은가? 저들이 각자 죄를 버리고 의를 따라 살지 않는가? 저들이 이제는 내 은혜를 알고 그 이웃들을 사랑하고 있구나, 저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구나" 하시도록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께 보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는 주님께 보람을 드리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시다.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헌신하기로 작정하는 게 있어야 참된 종려주일이요 고난주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무서운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갈 특권을 얻었으니, 이제 나는 무엇을 양보해도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내가 너를 쓰고 싶다"고 하십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양보, 나의 희생을 세상에 알리는 도구로서 너를 사용하고 싶다 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드려서 주님께서 보이신 모범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합시다. 그런 결심으로 새 출발을 하는 종려주일이 되어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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