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때엔 주께서도 죽으셨다(눅 23:1-12) [고난주간]
  • 2013.09.02 08:43:16
  • 사람이 이름을 날리려고 하면 타고 날 때부터 머리가 좋거나 또 특출하게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야 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또 시대를 잘 타고난다 하더라도 앉을 때와 일어설 때, 나설 때와 들어갈 때 그리고 살 때와 죽을 때를 잘 알아서 적절하게 그 때에 자기를 맞추면 가장 지혜 있는 자라고 또 성경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이러한 때엔 주께서도 죽으셨다」라는 주제로서 그 첫 번째 시간의 말씀을 드리게 되겠습니다. 앞으로 한 이삼 차례 계속해서 이 같은 주제로 말씀을 여러분께 올리게 되겠습니다마는「이러한 때에 주께서도 죽으셨다」이런 주제로 말씀 생각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는 형편에 있으니 주님과 같이 이러한 때가 오면 차라리 죽는 게 사는 것 보다 낫겠구나 하는 그 지혜로운 때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단이 청구하여 그러했지만 제자 하나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돈을 받고 팔아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또 다른 제자, 제자 중에서 가장 미더웠던 베드로 같은 사람도 주님을 옆에 두고 철저하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을 주께서 직접 들으시고 그 배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전전 시간에 오늘 본문의 직전 장에서 본문으로 해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 23장 조금 앞에 있는 22장 66절로 71절이 전전 시간 바로 다음 말씀이라서 이어 참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62절을 보면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라는 말씀까지 저희가 생각을 했고요. 
    66절 이하를 또 봅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눅22:66-71) 이런 상황을 우리가 읽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이 예수께 닥쳐오니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택하셨느냐 하는 주제로 말씀드리게 되는데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 그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그리스도라 해도 안 믿는 상황이 왔다 그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오심을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따라다녔지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무리들과 그 관원들이 다 그리스도 자신이 "나는 그리스도라"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터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살다보면 내가 나라고 그래도 안 믿어 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정확한 객관적인 것을 표현해도 무슨 소리하느냐고 이렇게 오히려 윽박지르면서 도무지 믿지 아니할 그런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였습니다. 
    "내가 나를 나라고 표현해도 너희는 믿지 아니할 것이요 그리고 너희가 나를 따라다니고 믿었지만 나를 곤경에서 건져내기 위한 어떤 증거도 너희가 말해주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물어도 내게 유익이 될만한 내용은 너희들이 내게 말해주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노라."이런 상황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님은 계속 살아가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죽을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이제는 이 세상에 더 살아있으실 생각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 권능에 앉으리라." 이것은 "세상을 떠나겠다. 이 세상을 떠나겠다. 너희가 사는 이 세상을 나는 떠나겠다." 바로 이런 표현이 됩니다만 그런 이제 내가 죽어서 여기를 떠나겠다 해도 물고 늘어집니다. 
    "아니 네 말하는 것을 살펴보니 이제 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있느냐? 네 말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너희가 말하는 바로 그니라 이러니 더 이상 증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자기 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죽이자."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혹 아닐지라도 혹 긴가 싶어서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쩔까 싶어서 일단은 '나는 손 안대겠다' 이렇게 해야 정상적인데 사단이 그 제자들 마저 청구하고 그 주위 사람들을 청구 하니까 이것은 온통 분위기가 상식을 벗어나는 이런 분위기로 이제 변해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사단에 청구되어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또 아무리 주께서 주님이 주님을 주님이라 해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 해도 믿지 아니하는 이런 형편에 들어가고 또 예수를 곤경에서 건질만한 살릴만한 많은 증거를 가졌던 무리들이 다 따라다녔으나 멀찌감치 피해 가지고서 예수를 위하여 "그에게 죄가 없습니다. 그에게 잘못을 없습니다." 말해줄 사람 아무도 나타나지 않더라 그겁니다.

    예수님께서 혹 "여보시오. 당신은 날 잘 알지 않습니까? 나에 관하여 말해주시오. 이 재판장에게 이 빌라도에게 이 헤롯에게 나를 그대로 좀 말해 주시오. 진술 좀 해 주시오." 아무리 부탁을 해도 아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된다면 살아 버티려고 하지 말라 그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상황은 내가 죽어야 될 상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살려고 하신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시고 죽음의 깊숙한 십자가에로 가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이제 계속되면서 다시 말씀드려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고 또 부인하고 또 많은 권세자와 그 관원들과 심지어 모든 백성들까지도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라 해도 이제 믿어주지 아니하고 나를 위하여 뭔가 좀 말씀해 주시오 라고 해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이런 상황 
    그리고 예수님께서 한마디하면 할수록 더 그것을 올무 삼아서 더 죽이려고 공격하고 심지어 이 세상을 떠나서 여러분 곁을 떠나서 하나님 보좌 우편 하늘에 가겠습니다 라고 해도 하늘 나라 가겠다는 사람까지 붙들고서 막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이제 옵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실 때인 줄 아시고 죽음의 길 가시기 시작하는데 이제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또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을 예수님이 맞으셨는데 누가복음 23장 1절로 7절에 보면 무리가 다 일어나, 그 동안에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까지 다 일어나서 빌라도에게 어떤 고소를 했는고 하니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 자입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당신의 황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저 로마의 황제께 세 바치는 것을 금한 자입니다. 그리고 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떠들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제 고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히려 가이사에게 세를 철저히 바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국세든지 공세든지 어떤 세든지 그 세를 받을만한 권세 자들은 다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내신 바이니 그들을 순종하고 그들에게 세 바치라." 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가이사에게 바칠 세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바치라고 했던 겁니다. 뭐 그 내용이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조금 앞에 20장 22절 이하에 이렇게 나타나 있는데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들은 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20장 22절 이하를 볼까요.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물론 이렇게 물은 사람들은 그 앞에 내용을 보면 20절에 보면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를 올무에 걸어서 이제 그 죽도록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물었을 적에 예수님 대답이 이제 나오는 겁니다. 22절 다시 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런즉(가이사의 것이니 이 세상에 쓰고 있는 돈은 가이사의 것이니)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불과 이삼일 전에는 예수님께서 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 했습니다. 철저히 바치라고 했던 것이지요. "너희가 통용하고 있는 동전을 가져와 봐라. 화폐를 가져와 보라." 그래서 돈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임금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리고 어느 나라 얼마 짜리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글이 뉘 글이며 뉘 화상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쳐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때 책잡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지혜로운 말씀에 가이사에게 세를 분명하게 바치라는 이 주장 때문에 예수님을 책잡지 못하고 "참 머리 좋네. 지혜 있네." 하면서 예수님을 책잡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한 이틀 이삼일 지난 후에 다시 예수님을 잡지 못하고 있던 이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죽일 목적으로써 빌라도에게 가서 보고할 때에는 앞 뒤 말 다 빼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정확한 말씀 중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 말만 빼어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 이 말만 들고 나가면 가이사에게는 바치지 말라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참 악하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하나 죽이려고 그러면 앞 뒤 전후 사정 다 보고서 그대로 설명해야 객관적일텐데 아주 합법적이고 정직한 판단이 될텐데 앞의 말 쏙 빼어버리고 "하나님의 것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의 하신 말씀과 틀리지도 않습니다. 앞의 말만 빼어 버리면 뒷말만 주장하면 가이사에게 세 바치지 말라 한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그러므로 죽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황제는 가이사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분봉 왕이 있다면 헤롯 입니다. 그리고 큰 황제는 가이사 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수는 자기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합니다. 지금 유대에 무슨 완전한 왕이 있습니까? 본봉 왕 헤롯밖에 없으며 진정한 왕은 로마에 계신 황제 가이사가 아니겠습니까?" 이러면서 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 고하면서 이제 또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아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 했다는 이 고발도 어이없는 순전히 뒤집어씌운 내용이 되지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이 말도 어이없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오늘 빌라도에게 잡혀왔어도 말씀하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말대로 내가 그니라."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때 당시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코 여기에 고소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고소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임금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님은 한다 라고 했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임금이라고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사람들이 고소한 내용대로 맞으려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앞으로 유대인의 왕이 될 꺼야"라고 했으면 고소꺼리가 됩니다. 지금 유대인에게는 왕이 있습니다. 왕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엄연히 있는 왕을 두고서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잘 이해해 보십시오. 왕이 있는데 자기가 왕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현재 있는 왕을 물리치고 예수님이 왕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한다면 "나는 앞으로 왕이 될 꺼야"라고 해야지요. 그리고 헤롯 왕권 그 정권이 물러나도록 퇴진 운동을 그 제자들과 그 무리들과 함께 해야지요. 예수님은 그 제자들과 수많은 백성들에게 "헤롯을 쫓아내자. 헤롯을 물러나게 하자. 그 자리에는 내가 가야된다" 이런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헤롯은 그 왕좌에 앉아서 그 왕위에 오른 대로 아직까지 예수님 때문에 그 왕위를 도전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들었던 것은 헤롯 왕권을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왕은 이 세상의 지금 왕 되어 있는 헤롯의 자리를 지금 넘어다보고 한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영적인 왕이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나는 앞으로 왕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면, 헤롯은 도전 받겠지요. 그리고 그 많은 백성들의 인기를 모아 가지고서 "헤롯을 떠나가게 하자. 헤롯을 물러나게 하자." 하면서 혹 서명운동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고소꺼리가 되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당당하게 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 헤롯의 왕 노릇에는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으시면서 "나는 유대인의 왕이니라.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왕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앞으로 될 것이라고 하면 걸리지만 지금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무 죄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소꺼리가 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정상적인 머리를 가졌던 빌라도,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판단해 본 결과가 무엇입니까? 23장 3절로 4절 보실까요.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지금 왕이냐? 현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지금 내가 왕이다." 그럽니다. 
    그런데 이 왕이 둘이라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빌라도가 판단하기를 4절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랬어요. "너희가 고소한 그런 죄가 없도다." 
    그 고소 내용이 뭡니까? "이 사람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말한바 그 고소한 내용과 전혀 다른 왕이야. 이 사람은 지금 이스라엘의 분봉왕 예루살렘의 분봉 왕 헤롯 왕권을 찬탈하려고 조금도 도모한 적이 없어. 그의 무리들과 함께 헤롯을 무너뜨리고 한 적이 전혀 없어. 전에 세례 요한은 헤롯에 대하여 공격한 적이 있어도 이 예수는 그런 적이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왕 되겠다면 또 문제가 되지만 지금 왕이래? 그런데 무슨 죄가 있느냐? 헤롯 왕의 왕과 이 예수의 왕이란 왕이 다른 왕이야. 난 잘 모르지만 너희는 하나님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세계의 무슨 왕이라는 뜻이지 내가 볼 때에는 헤롯을 넘기겠다 가이사를 해먹겠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그러므로 이 예수에게 죄가 없노라."
    믿지 아니한 빌라도 라도 저 이방 나라에서 온 총독 빌라도라도 그를 객관적으로 신문해보니 죄가 없습니다.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어보니 그에게 죄가 없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다 라고 고소하는 사람들 고소하지만 예수님의 얘기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세 안낸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처럼 죽이기 위해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얘기들을 앞 뒤 다 뽑아버리고 이렇게 말을 만들어 가지고서 죽음으로 내어 몰고 있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어려움을 당하신 형편이 되니 이제는 점점 죽음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했어도 곡해를 합니다. 아무리 바른 말을 했어도 앞 뒤 말 다 짤라 버리고 걸릴 말만 만들어대니까 얼마든지 죄인이 되는 이런 형편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말한 것처럼 그에게 죄가 없지 않습니까? 이 고소 받을만한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세를 못 바치라고도 한 적이 없고 그리고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를 무너뜨리려고 한 적은 더욱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고 고소를 받아서 지금 이렇게 붙들려 가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강도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붙들린 강도처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쯤 되면 억울해서 아니라고 해야지 않겠습니까? "나는 너무 진실한데 나는 너무 정직한데 이 사람들이 고소한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 억울합니다." 하고 외쳐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억울하니 죽기로 결심한 겁니다. 이 사람들과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니 이 사람들이 주장한 고소에 대하여는 죄가 없으니 차라리 죽기를 택하셨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예수님이 택하신 이런 상황에서 해명을 하려고 그러고 면하려고 그러고 죄가 없으니 살려고 버티는데 예수님의 택하신 것은 이렇기 때문에 죽겠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죽어도 남는 게 있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여러 여자들이 나와서 버티는 여러 일들을 보았습니다. 누가 얼마만큼 거짓말을 했는지 또 얼마만큼 억울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억울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나와서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곤란한 것은 기억 안 납니다 하면서 전부 그 형편을 면해 보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을 향하여 돌팔매를 던지는 온 국민과 온 전체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저들과 같이 하던 동료들도 이제는 돌아섰습니다. 버티고 버티고 해명해 보고 해명해보고 살아 남아보려고 남아보려고 하다가 다 살아가는 여자들을 봤는데요. 저는 지금까지 남자들은 그렇게 볶아대면 대부분 죽던데 과연 여성은 힘이 강하다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자신을 위해서인지 남편을 위해서인지 자식을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참 대답한 분들이다 이런 생각을 해서 버티기는 버텼는데 다시금 특별 검사가 나타나서 또 조사를 한다니 차라리 그때 억울하게 죽었으면 다시 조사를 하면 억울하게 죽었던 사람 참으로 귀하게 다시 올릴 터인데 버티고 버틴 일 때문에 나중에 만신창이가 될 형편이 또 되어 있는 것을 보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방법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쯤 억울하게 되니까 "지금은 내가 살 때가 아니다. 억울하니 죽어야 갰구나. 나는 고소한 내용의 죄가 없으니 죽어야 되겠구나." 이건 누구를 믿어야 가능한지 아십니까? 죽은 후에도 공의로 판단하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믿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 믿지 못하면 이런 억울한 때에는 풀어보겠다는 겁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다 풀어야 되는 줄 아는데 이쯤 되면 풀려고 하면 풀려고 할수록 더 만신창이가 되니까 이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처럼 마지막 기도하고 가야되는 겁니다. "주여 내 영혼과 내 명예를 주께 맡기나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이런 예수님의 방법은 어렵지요. 

    게다가 더 특이한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까 함께 읽었습니다만 23장 8절로 12절까지의 내용이 됩니다. 이 특이한 이 상황이 나타나니까 주님은 차라리 죽음을 맞으셨는데 어떤 상황이었느냐 하면 막상 예수님이 붙들려서 헤롯에게 가니까 헤롯은 예수께 대하여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막 티끌을 날리면서 "이 자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왕이 있다면 우리의 분봉은 헤롯이며 더 큰 왕이 있다면 가이사뿐인데 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하면서 막 티끌을 날리고 열을 내고 옷을 찢고 이 대중들 이 군중들은 죽기로 살기로 예수님이 왕이라고 했다고해서 죽기 살기고 설쳐댑니다. 어떻게 열심인지 먹지도 않고 나와 가지고서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하는데 
    그래서 붙들려 가지고 헤롯에게 갔더니 헤롯은 참 우리 지방말로 널름하다 그 말입니다. 위로 올라가니까 윗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니까 "잘 되었다. 잘 되었다." 한다 그겁니다. 그가 잘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딴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백성들이 막 소리쳤던 것처럼 "뭐야? 무엇이. 네가 나를 넘어다본다고? 네가 내 자리를 넘어다보았다고?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 잘되었다. 이제 내 손에 한번 죽어봐라." 하면서 칼을 뽑는다든지 또 영화 같은 것 보면 밑에 사람들이 졸개들이 죽이려 고하니까 "그놈은 내가 직접 처리해. 나와!" 해서 나가니 "저놈 잘되었다."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전혀 예수님을 만나니 아주 기뻐했는데 어떤 뜻으로 기뻐했느냐 하면 "잘되었다. 한번 보자." 그랬어요. 무얼 보자고 했는고 하니 "소문만 듣고 내가 당신 하는 그 재주를 못 보아서 굉장히 보고 싶었는데 당신이 이적을 많이 행한다던데 어디 내 앞에서 한번 해 보시오. 아 참, 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전혀 백성들과 윗사람과 달라요. 윗사람은 보통스럽게 여기는데 백성들 바깥에서 뒤집고 벅구를 넘고 야단이다 그겁니다. 참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한번 같이 보실까요. 아까 읽었습니다만 23장 8절 이하로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헤롯이 예수를 만나려고 한번 보았으면 했던 것은 이 백성들이 옷을 찢으면서 벅구를 넘어가면서 야단법석 떨었던 헤롯 왕 자리를 이 예수가 뺏으려 합니다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전에부터 소문을 들어서 한번 보고싶었는데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요술 보듯이 한번보고 싶다 그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너무 그렇게 심각하지 마시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하, 내가 당신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한번 해 보시오." 이렇게 나왔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정작 헤롯은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그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왕위에 대한 도전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겁니다. 그저 소문 듣고 무슨 큰 재능 한번 보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겁니다. 이게 헤롯입니다.

    여기서 잠시 한 몇 년 전을 제가 한번 회고해 보면 우리 주위에 있는 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저 직장에 같이 있거나 시장 통에서 같이 장사를 한다거나 해도 다른 교회 간판 밑에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우리 산해원 교회 성도만 보면 부정타는 것처럼 말도 하지도 않고 피하고 야단들이었어요. 
    그래서 이 정말 이 교회가 그런가 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었는데 여길 못 와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 사람이 가히 없어요. 왜 못 와 봤는고 하면 부정탄다고요. 여기 가까이 오면 뭔가 이상하게 묻어서 저주가 묻는다고 못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우리 성도님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아파트 한 라인에 우리 교회가 명패 교패를 붙여 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패" 이런 사람들까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 성도들간에는 굉장해서 제가 교단으로 복귀하면서 이제 위에 있는 아주 중진들에게 가게 될 때에는 곤장도 맞고 밑의 사람들도 이런데 그 위에야 오죽하겠나 싶어서 벌벌 떨면서 갔더니 한마디로 심각하지 않아요. 그 윗동네에서 심각하지 않은 것을 이 단에서 시간도 없고 해서 또 말하는 것이 별로 유익 되지도 않을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립니다만 헤롯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여간 심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저 밑에 백성들은 굉장해요. 죽고 살기로 그냥 원수시해요.

    그래 예수님께서도 헤롯에게 갔을 때 심각하지 않는 헤롯을 보고 '헤롯왕이여, 나 억울합니다. 살려주세요' 하지 않았습니다. 만백성이 티끌을 날리며 훤화하며 대어드니까 그 헤롯이 여러 말을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면 너도 나를 죄 없다 하겠지. 빌라도처럼 하겠지. 아니야, 그러나 나는 죽을 테야. 너희 위의 사람들은 나를 죄 없다 하지만 나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것이야." 이건 누가 가능하냐? 죄 없기 때문에 더 가능했습니다. 
    주님께서 죄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소가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 세상의 상식은 억울하면 면해야지요. 해명하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주님은 해명을 주님께서 해 주실 때 영원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해 주실 때 그때에 명예 회복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억울하다가 자기가 맞다고 해서 버티고 설치고 막 노력하게 되면 진흙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더 깊이 허우적거리며 더 빠지듯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던 겁니다. 
    그러나 이 인생이 주님을 따라가면서도 주님의 시기 적절한 판단과 죽을 때에 죽고 살 때에 살려고 하는 이 주님의 방법을 몰라서 좋은 시대를 만나고 좋은 기회를 탔어도 그만 해명하려고 발버둥치다가 그만 명예를 지킬 수 있고 높일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참 많은데, 오늘 이 설교와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이 선택한 시기를 한번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경우가 되어진다면 차라리 억울하니 나의 이 해명을 하나님께 맡겨보자 하는 판단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싶을 때에는 전에 국회에 나왔던 여자들처럼 오히려 안 버틴 것이 뒤에 특별 검사가 나타나면 더 좋을 뻔했는데, 두고 봅시다.

    그리고 또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또 특이한 상황 하나가 벌어졌는데 이 유대인의 왕 헤롯과 로마로부터 파송되었던 가이사가 파송했던 이 총독 빌라도는 앙숙 관계에 있었습니다. 서로 잘 통해야 될텐데 중앙정부에서 보낸 사람하고 지방 자치제 장하고 뭔가 당이 안 맞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안 맞지요 물론. 안 맞으니까 서로 좋지 않아서 으르렁 으르렁 이렇게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붙들어서 빌라도에게 보내니까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해보니 죽일만한 죄가 없습니다. 죄도 없는 사람 죽였다가 또 나중에 말들을 것 같으니까 "에이 골치 아픈데" 하면서 죄 없다 라고 하니까 또 백성들이 말하기를 "아, 이 사람이 갈릴리에서부터 소동을 일으켜서 이 예루살렘에까지 우리를 혼란케 했으니 이를 죽여야 됩니다."라고 하니까 빌라도가 눈이 번쩍 귀가 번쩍 들렸다 그겁니다. 
    "뭐라 했소? 갈릴리라고 했소? 어 갈릴리? 갈릴리 같으면 내 지역이 아닌데 내 관할구역이 아닌데 거기는 헤롯 구역인데. 헤롯이 마침 예루살렘에 무슨 공무가 있어서 올라와 있다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으로 여겨서 나사렛 사람으로 여겨서 헤롯에게 보내겠소." 해서 헤롯에게로 보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또한 예수를 보자마자 재주나 부리는 것 한번 보고싶다 하던 터에 예수를 보자마자 헤롯이 자기에게 보내주니까 굉장히 감사했다 그겁니다. "내 관할구역이라고 이 빌라도가 예의를 따져서 내 관할지역 사람이라고 자기가 전에 같으면 막 판단하고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던 사람이 어떻게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이제는 나한테 좀 잘하는구나. 내 관할 사람이라고 내게 보내는구나." 해서 이 빌라도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 그겁니다. 
    그러면서 또 이 헤롯이 이 예수에게 좋은 옷을 입혀 가지고서 희롱을 하고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풀어 보여주지도 않고 그저 아무 대답도 아니하니까 헤롯이 기분이 나빠 가지고서 "빌라도 총독각하, 내가 처리해도 좋겠지만 이 사람 죽이고 살리고 하는 문제를 내게 맡겨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내가 지금 예루살렘에 와 있는 형편에 이 사람이 또 체포된 곳이 예루살렘이고 하니 총독께서 처리하십시오." 하고 옷을 입혀 가지고 또 총독에게 또 보냈다 그겁니다.

    그래서 예수 하나 붙들고서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고 하니까 이 두 사람 사이가 그동안 원수같이 지내왔으나 예수 하나 죽이려는 데에는 서로 친구가 되더라 그겁니다. 참 이 죽을 때가 되면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사람들도 이 파 저 파 전부 합하여 전에는 이 파 저 파끼리 으르렁 으르렁 하면서 말도 하지도 않고 교류도 하지 않고 있다가 누구 하나 죽이자 하는데는 그냥 합심한다 그겁니다. 여야가 없어. 동서도 없고 여야도 없어져버린 이런 또 특이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 상황도 한번 읽어보실까요.
    10절 이하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0-12) 그랬어요. 
    누구 어떻게 하자는데 마음이 합해졌다는 말입니까? 예수 죽이자는 데 마음이 합해졌다 그겁니다. 예수님 이런 형편 되니까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겁니다. 차라리 죽음을 스스로 택하시고 죽음의 현장으로 들어가셨다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고소한 내용을 따라 살펴본다면 전혀 죄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말씀은 모두 진리였으며, 가이사에게 세 바치지 말라는 말 한 적이 없고 오히려 바쳐라 했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도 전혀 빌라도의 판단대로 헤롯왕을 건드리려고 했던 것이나 가이사에게 어떤 도전을 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를 따라 다녔던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 안낸 사람이 없고 그리고 헤롯 물러나라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목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죄목 때문에 그리스도로 오신 주께서 나 그리스도라 했다는 죄목 때문에 세를 바쳐라 했는데도 못 바치게 했다고 뒤집어씌운 말 때문에, 헤롯의 자리를 넘어다본 적이 없는데 헤롯의 자리를 탐하였다고 헤롯을 무너뜨리려고 정권탈취를 하려고 했다고 고소를 당했으니 참으로 억울하지 않습니까. 온 백성들이 그렇게 고소해서 떠들고 있으니 너무나 억울합니다. 
    주님께서 해명을 하려면 해명할 만도 합니다. 빌라도에게 부탁할 수도 있겠습니다. 헤롯왕에게도 "분명히 헤롯이여 판단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해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서 해명을 해볼 만도 한데 확실히 억울하니까 해명하지 않았다 그겁니다. 주님은 확실히 옳았으니까 남이 틀렸다 라고 소리치는데 대하여 아니요 맞습니다 라는 말하지 않았다 그겁니다. 
    세상 상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절대로 맞으면 해명하려고 합니다. 변명하려고 합니다. 틀린 것도 맞다고 하는데 분명히 잘못한 것 생각이 머리 속에 차서 입에 말이 나오는데도 기억이 안 납니다 하는데, 세상 모든 방법은 맞으면 더욱 맞다고 하고 틀린 것 맞아도 거짓말 해 가면서 맞다고 할 판인데 예수님께서는 맞은 것을 틀렸다 라고 누가 말하니 맞기 때문에 죽는다 그겁니다. 억울하기 때문에 죽는다 그겁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만 가능하냐? 내 뒤에 하나님이 또한 계시다는 것을 믿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것입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어도 "내가 억울한 것 내가 다 풀지 못하면 나는 억울해서 살수 없어. 나는 이것은 반드시 풀고 해명하고야 말거야." 그렇게 해서 열심히 자기를 병명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많습니다. 누가 자기를 좀 무시한다거나 자기를 좀 얕잡아 본다거나 하면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잘못이 가히 없는데도 이런 우겨 쌈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반드시 살아 버텨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도리어 더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해명할만한 높은 사람들을 만났어도 해명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너무 맞기 때문입니다. 주께 너무 잘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호리라도 남김없이 이 눈썹 털 하나만 한 것이라도 계산에 틀림이 없이 의는 의대로 갚으시고 죄는 죄대로 갚으시는 공의로우신 판단을 반드시 해 주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내가 죽은 다음에 이런 해명을 언제 받겠느냐?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억울한데 죽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를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은 상황이 이쯤 되면 주께서는 해명하고 더 살아야 되겠다 라는 판단보다는 "내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되겠구나. 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되겠구나." 죽을 때인 것으로 판단하시고 그 죽음을 택하신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그처럼 죽으셨던 주님, 그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만큼 억울함을 풀어주셨는가? 그에게 억울하게 공격했던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던가? 
    이제 다음 시간 다음 시간 계속해서 말씀이 이어지겠습니다만 주께서는 더 큰 유익을 바라보고 더 큰 영광을 바라보고 자기를 억울한데 던졌던 이 모습을 우리가 지켜보면서 우리가 해명하고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버텨야 할 때는 언제이며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장래를 위하여 차라리 죽을 때는 언제인가?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그 합당한 지혜를 우리도 붙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잠깐 소개해드린다면 그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범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남자는 죄에 대한 처벌로써 벌받게 됩니다. 종신토록 땀을 흘려 수고하여야 겨우 먹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여자에게는 네가 이같이 하였으니 해산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여 네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거의 죽는 것 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 했을 때 놀랍게도 아담은 자기 지은 죄에 대하여 종신 벌을 받는데 불평하지 않습니다. 고생이야 되겠지만 차라리 땀흘리면 얻는 게 있다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를 지었으되 죄값을 치르고 나면 자유하지 않습니까? 그가 기쁨으로 죄 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여인도 해산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가 득남하였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찌 기쁠일입니까만 아담과 하와가 바랬던 기쁨은 따로 있었습니다. "내가 큰 죄를 지었으나 이 죄 값을 내가 치른다면 치르고 있는 동안에는 나는 자유를 향하여 가는 자야.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실 것이야." 그렇습니다. 
    죄 값을 치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만약에 가인처럼 죄는 지었지만 그 죄에 대하여 벌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의 벌은 너무 중하여 내가 견딜 수 없나이다. 좀 감하여주소서. 죄는 지었지만 벌은 안 받게 해 주소서." 요청하니 하나님은 즉시로 "벌받기는 싫은가? 죄는 인정하는가?" "예, 합니다." "그 죄에 대한 합당한 벌받기는 싫은가?" "예 싫습니다." "알았어. 그러면 내가 네 이마에 표를 주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네 죄에 대한 벌을 행치 못하도록 하여 네 수명대로 살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표를 받아서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죄는 지었으되 죄 값은 갚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보십시오. 영원한 천국의 시민 된 뿌리와 줄기를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서 위로부터 올라가면 하나님 바로 밑에 아담은 들어갑니다. 그러나 죄는 짓고 벌은 받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했던 가인은 빠져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짓고 쫓겨났다고 하여 아담과 하와 망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내려주시니 벌을 감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동행해 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죽지 않게 해 주셨고 그들의 제사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잘못을 저질렀거나 또 사회에 대해서 죄를 지었거나 할 때에 그 죄벌을 감당하지 않고 피하고 숨어 있으면 자기는 다되는 줄 알지만 피하고 피하다가 제 수명대로 살다가 가면 행복하게 끝난 줄 알지만 하나님이 그 죄값을 판단하려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차라리 죄지었으면 잡혀가서 감옥을 살고 있으면 그렇게 지탄받을 사람 아닙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재판관이 3년 살아라 2년 살아라 벌금 얼마 내라 정해줍니다. 그것 다 갚고 나면 다시 모든 권력이 회복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죄 없으시면 서도 죄값을 치르고 있으니 이 치른 죄 값으로 누가 살 것이며 남을 위하여 죄 값을 치러 주었다면 그의 나중 판단 재판에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을 것인가? 그의 오늘날의 영광을 보시고 대략 짐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니 억울한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닌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명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나는 그것 때문에 영원히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 믿으시고 예수님의 판단을 우리도 한번 붙들어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찬송을 부르십시다 420장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억울한 일 애매한 그런 말들로 많이 마음 상하고 "참으로 나는 옳았는데 참으로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 예수를 믿다보니 오히려 이웃들이 많아서 구역과 지구원들이 많아서 더 말이 많으니 정말 괴롭구나. 정말 억울하구나." 하면서 나름대로 해명하려고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해명을 해서 어느 정도 해명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우리가 노력해서 해명한 것도 중요하지만 웬만하면 그 억울한 소리 들리는 그 내용을 그 억울할 만큼 그 나쁜 일 하지 않고 진실했으면 차라리 해명을 받지 않고 훗날 필요할 때 그 해명을 내가 한번 받아썼으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믿으면 이것이 가능할 줄로 믿습니다. 
    정말 나는 잘못이 없는데 정말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너무나 우겨 쌈으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억울하게 몰아붙일 때 마치 예수님께서 죽음을 택하셨던 이런 상황이 내게 왔을 때 예수님처럼 차라리 죄 없이 죽기까지 했다면, 
    나중에 재판하여 주시는 그 재판으로 내가 정말 잘못했을 때 내 자식이 정말 잘못했을 때 그 어려운 지경에서도 허물을 덮어주고 다른 사람 눈에 발각되지 않게 해 주어서 죄가 있어도 죄 없는 것처럼 넘어가게 해줄 그때를 생각해서 견딜만할 힘이 있을 때에 견뎌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믿지 못하면 가능치 않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면 이것 가능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 어떠한 형편이 왔어도 그의 장래를 놓고는 그에게 억울한 것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어떠한 형편이 왔었다 할지라도 앞으로 온다할지라도 영원을 놓고 볼 적에 우리 하나님 앞에서 억울함이 있을 수 없는 저와 여러분인 것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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