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가 쓰시겠다(눅 19:28-40) [고난주간]
  • 2013.09.01 21:28:02
  •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에 이웃 마을에 살던 다섯 살 짜리 아이가 우물 위를 걷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같이 놀던 아이가 친구가 빠졌다고 소리를 쳐서 스무 살쯤 되는 그의 형이 우물 속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우물은 깊이가 15m 쯤 되었는데 그 샘물로 마을 사람 전체가 먹을 정도로 큰 샘이었습니다. 그 샘은 돌로 쌓아올렸기 때문에 조심조심해서 내려가면 샘 속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많이 해본 기술자나 샘 속에 들어갈 수 있지 처음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샘에 빠진 동생을 구하기 위해 내려가던 그의 형이 그만 발이 미끄러져 그마저도 샘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큰 끈에다가 두꺼운 판자를 묶어 내려보내 그들 형제를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결국 죽은 아이들을 끌어올리고 난 뒤 마을 사람들은 그 깊은 샘을 메워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섯 살 짜리 아이가 우물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
    르고 있었지만 그 아이의 형은 대담하게 위험한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
    다. 그는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습니다. 오직 동생을 
    구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동생을 구하러 샘 속에 들어가 
    그만 두 명의 귀한 생명을 잃고 만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전혀 돌보지 않은 형의 거룩한 사랑은 오래도록 큰 감동
    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사람의 얼굴이 선
    명하게 떠오릅니다. 저는 그 뒤 종려주일만 되면 그 사건이 생각나는데, 인
    류가 죽음의 우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
    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사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감명 깊게 묵상합니다. 예수
    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죄악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에서 건짐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
    라가시던 종려주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거룩하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어야 합니다.

    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수난예고를 네 번이나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체포되어 수난을 당할 
    때 제자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몇 차례 수난을 예고하셨습
    니다. 첫 번 째 수난예고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직후에 한 것으로 제자들도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셨고
    (마 16:21-28), 두 번 째는 변화산 사건 이후 갈릴리에서(마 17:22- 23),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 할 때 자신의 십자가의 수난장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마 20:17-19) 하셨으며, 마지막 네 번째는 제자들과의 최후
    의 만찬석상에서 가롯 유다가 배신하게 될 것(마 26:21-24)을 예고하셨습니
    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의 이 예언을 깊이 생각지도 않고 귀담아 듣지
    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만 젖어 있었
    습니다. 곧 다윗 왕처럼 강력한 왕이요 그 지역 이웃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왕을 기대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메시야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예고는 귓가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답답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의 이해가 없이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앞서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이해해주지 못했지만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신 것입니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원수들에게 잡혀
    서 재판을 받고 매를 맞으며 비참하게 역적들이나 받는 십자가 처형을 받아
    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길을 앞서서 가셨습니다. 따라가거
    나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라 앞서서 갔습니다. 죽으시는 길인데도 앞서서 가
    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이라
    고 하면 앞서서 가야 됩니다. 뒷걸음을 치면 안됩니다. 뒷걸음을 치는 사람
    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경제적인 무서운 한파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
    로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국난을 맞아 금모으기 행사를 
    통하여 나라 사랑의 마음을 모으기도 하고 해외 여행도 자제하며 '아나바다'
    운동(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합니
    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경제난국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생각하시
    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태산과 같은 빚더미 가운데 이 적은 것이 무슨 도
    움이 되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군대, 관청, 학
    교, 아니 교회까지도 온 나라가 다 썩어 버렸는데 나 혼자 바르게 산다고 무
    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에서 어린 소년이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소
    년 하나의 작은 도시락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깨닫
    고 자기부터 먼저 올바른 생활을 하고 각자 처해진 자리에서 솔선수범을 하
    면 이 나라에도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한 사람이 모여서 백 명, 천 명, 만 명, 사천만 명이 되
    는 것입니다. 개인 개인이 움직여서 세계의 역사가 바뀌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국가부흥도 요한 웨슬리의 한 작은 기도운동에서 비롯
    되었는데 후에는 영국을 영원히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는 신화적인 열강
    이 되도록 하였고, 미국도 얼마 안 되는 청교도들이 건설하였지만 오늘날 세
    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일
    에 '앞서서' 일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하고, 억지로 하고, 체면치레나 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앞서서 해야 합니다. 앞
    장서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안 되는 것
    도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
    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
    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
    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
    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앞
    서서 나아가야겠습니다.

    2.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을 때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에 보내시며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눅 19:30)고 하셨습니다. 혹시 누가 "어
    찌하여 푸느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나귀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시에 타고 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
    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승리를 위해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시는데 타실 
    나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는 아직 일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타고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새것, 한 번
    도 써보지 않은 것, 사람이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블
    레셋 사람들이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아 갔으나 무서운 재앙을 만나 법궤를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보내면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도록 하였습니
    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것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 중에서 가장 소중
    한 시간을 드려야 하고 물질 중에서 첫 열매를 드려야 하며 나 자신의 마음
    의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가서 그 나귀를 풀 때 그 임자가 "어찌하여 나귀새
    끼를 푸시오?"라고 따졌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
    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임자는 순순히 그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이 부
    분을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나귀주인에게 미리 연락을 해서 부탁했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나귀 주인의 신앙심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 
    그냥 두 제자를 보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
    할꼬 생각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
    고 하시니까 그냥 내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부탁에 망설일 겨를도 없
    이 허락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에서 '주'는 '주인'이나 '왕'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란 말은 '나귀의 진짜 주인'이란 말입니다. 물
    론 나귀의 임자가 있었습니다. 그 임자는 만물을 주님의 것으로 믿는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기에 나귀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잘 알
    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상 우리의 소유 곧 내 몸과 시간과 물질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아
    니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이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소
    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 나귀 임자는 바로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께서 필요로 하신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필요한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어린 소년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떡의 진짜 주인을 주님으로 알
    았기에 내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부터 굶었는데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지만 주님의 필
    요에 따라 내놓는 사람을 축복하시어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필요에 내 것을 주님께 내놓으면 오 천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
    를 남게 하십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고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 잘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벳사게 나귀주인은 알았습니다. 너무나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3. 주님이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
    게 하십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런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자들도 겉옷을 벗어 나귀 안장을 삼고 길가에 펼쳐놓기도 하였습니다. 제자
    와 많은 무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예수의 입성을 환영하면서 "찬송하리
    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영광이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고 했습니다. 제자와 무리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은 정말로 참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하여 감히 메시야에게 붙이는 칭호를 다 써가며 찬양할까 하고 몹시 못마땅
    해했습니다. 아무리 예수가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런 호칭은 쓸 수 없
    는 것이 저들의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눈을 가지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없이는 예수를 메시야로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이나 남편, 친척,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눈이 판단의 잣대입니다. 영의 눈이 없는 이들에게는 기독
    교 신앙이 무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며 예배드리는 것은 아무 생산성도 없이 오히려 많은 해를 미치는 
    소모적인 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공산주의는 무너졌지만 기독교 
    신앙은 공산주의가 무너져 내린 그 자리에서 다시금 왕성하게 꽃피우고 있
    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와서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찬양을 안 하면 다른 자연계라도 동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와야 할 주의 일군을 사람이 돕지 않으면 까마귀라도 동원하셔서 도와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영원히 버림받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 주님께 앞장서서 섬기고 나의 것을 드리고 찬양합시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1월에 저는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두 자녀가 대학에 다니는데 등록금이 모자라니 백 만원
    만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편지를 너무 많이 받기 때문에 그냥 
    휴지통에 집어넣으려는데 그 순간 주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습니다. "네 교회가 하지 않으면 다른 이를 통해서 돕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바로 무릎을 꿇고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게 내려주신 축복을 묵상하고는 곧바로 백 만원을 보내준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지 않으면 나에게 주시려던 주님의 축복이 그냥 지나가 버리
    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여기 있나이다"고 순종해야 합니
    다.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를 쓰시옵소서"라고 해야 합
    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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