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산나! 호산나!(눅19:28-40) [고난주간]
  • 2013.09.01 21:28:57
  •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며 고난주간의 시작이 되는 
    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우리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 1주간으로써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
    신 주간입니다. 이 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환영을 하였기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관한 기사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은 되도록 피하여 가셨는데 이날만은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성내가 인산인해를 이루
    고 있을 때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바라다 보이는 감람산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제자 두 명을 앞에 보이는 벳바게 마을로 
    보내셔서 나귀를 끌고 오라 고 명하셨고 이 말씀대로 두 명의 제자들이 마을에 가서 나귀를 끌어 왔고, 다른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에 안장을 만들어 드리고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 고갯길을 내려와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하였습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말인데 보통 우리의 말로는 "만세!" 라는 말로 통용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백마를 타고 거들거리며 수많은 호위병을 대동하고 다니는데 비하여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호위병도 없습니다. 다만 열두 명의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광하며 환영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시면 당장에 로마의 총독을 비롯하여 로마군병들을 몰아내고 당시 로마에 아부하여 정치적으로 
    권력을 받아 권세를 부리는 부패한 정치인들도 몰아내고 새로운 왕정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가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아, 혁명적인 메시
    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와 같이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도 처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중에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
    지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했습니다. 고향 나사렛에서는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이것도 모자라서 낭떠러
    지에서 밀쳐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며(눅4:29)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까지 하였습니다.(눅11:15) 

    유대인들이 예수를 잘못 알고 환영을 하였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적인 환영이나 정치적인 찬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 적인 영광을 구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예루살렘에 가면 서로가 오른편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할 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 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이 시간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요즘 몇 명씩 그룹을 지어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면 십대 청소년들은 깜박 자지러집니다. 온통 괴성을 질러대며 손을 흔들다 못해 온몸을 흔들고 어떤 학생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엉엉 우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우리들은 그 예수님이 바로 나 때문에 내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데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얼마나 소리쳐 찬송을 불러보았습니까?

    운동장에서 축구경기가 한참 벌어질 때 응원하는 팀이 꼴을 하나 넣어보세요 
    수만 관중이 환호를 하며 열광합니다. 야구선수가 안타를 치든지 홈런을 하나 치면 온 천지가 떠나가라고 환성을 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언제쯤 꼴이 터질까? 언제쯤 홈런을 칠까?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 순간이 오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이르자 제자들을 보내어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제자 둘이 가서 나귀를 끌고 오려고 하자 나귀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가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고 할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고 하자 쾌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는 이 말에 선 듯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인간이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이익이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 드린 것입니다. 
    나귀를 드렸다고 해서 누구 하나 칭찬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길 바랍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농촌에서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귀를 보면 말처럼 크지도 멋지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순종적이고 겸손하며 오래 참음이 있는 작지만 야무진 동물입니다. 우리 사회에 그리고 평강교회에 멋진 말보다는 나귀같은 성품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부딪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다면 무엇이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2. 제자들의 순종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이 나귀를 끌어와라 할 때 그대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나귀를 끌어온 제자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그저 순종만 하면 됩니다. 행함의 실천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천할때 우리는 비로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2) 겉옷을 벗어 안장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안장에 상아와 금과 은으로 온갖 장식을 만들어 달았지만 만 왕의 왕 예수님의 안장은 제자들이 겉옷으로 만들어 예수님이 앉으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왜 옷을 벗어서 이와 같이 하였습니까? 그것은 최고의 존경을 뜻하는 것입니다.

    (1) 길에다 겉옷을 깔았습니다.
    지금도 외국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펫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2)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는 잘 시들거나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왕이 행차를 할 때에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주님을 환영하는데 쓰일 나무는 시들거나 마른 것은 안됩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도 새롭고 싱싱해야 합니다. 생명과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믿음도 푸른 종려나무와 같이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3)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 118:2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형통케 하옵소서" 라는 뜻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짖을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 환난에서, 이 고통에서, 이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구원의 요청이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고 우리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막10:46-52절에는 길가에서 구걸하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음으로 가시던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그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습니다. 
    마15:21-28절 말씀에는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눅17:11-19절 말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열 명의 문둥이가 나와서 예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환난과 고통 중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우리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 중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사랑, 그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 왕의 왕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이 못 가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절대로 주님을 믿는 믿음이 변치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변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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