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상(시편 1:01-06) [사순절 시리즈]
  • 2014.03.22 17:05:29
  • 사순절을 보내면서 경건의 시간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데 지난번에는 금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고 오늘은 묵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조금 전에 읽으신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에서 발행하는 Q.T 책이름도 ‘복 있는 사람’으로 정했죠. 말하자면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묵상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묵상의 정의


    ‘묵상’을 국어사전을 통하여 그 의미를 찾아보면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것’, ‘마음에 묵묵히 생각하는 것’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에 나타나는 묵상이라는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haga라는 단어인데 이는 ‘신음하다’, ‘곰곰히 생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다 통합하여 생각해 볼 때 묵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는 신앙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신음할 정도로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말씀이 마음속에 다가올 때 어떤 때에는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씀이어서 한숨과 신음이 나오는 깊은 고뇌의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묵상은 나만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묵상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 문을 열 때 우리는 성령님이 계시는 마음의 성전으로 이끌려가며, 거기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교통과 교제, 친밀함의 세계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마음의 문을 열도록 강조하는 내용으로 사용되어졌지만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아시아의 일곱교회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의 말로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라는 촉구의 메시지입니다. 말씀을 향하여 문을 열 때 사도 바울이 말씀한 바 ‘몸의 성전’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차려진 성전으로 안내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런 까닭에 구약성경 중 모든 신앙의 인물들이 이 묵상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심오한 교제를 나누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런 영적인 교통이 끊어졌고, 그들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저 멀리 라헬이 오고 있을 때 석양이 지는 들판을 바라보며 묵상하고 있었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얼마나 멋진 장면입니까? 다윗은 시편 119편 97절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묵상을 생활화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도 “내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출애굽기 3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세를 향하여서는 마치 사람이 대면하여 보듯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대면하듯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20장 19절에서 “19.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시대에 좋은 설교자를 강대상에 세워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되지 이 바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성경을 읽는 것도 힘든데 묵상이라니.... 라고 하는 소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저 제대로 된 설교만 들으면 우리 마음의 기갈이 저절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는 생각과 똑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피상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불순종하는 영에 의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의 힘은 말씀에 대한 순종인데 순종하기 싫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담이 조금 작기 때문입니다. 


    묵상을 해야 할 필요성


    오늘날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조급한 시대입니다. 대단히 빠른 스피드 시대입니다. 거기에다가 기계가 주도해나가는 스마트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흔히 스마트 치매라는 병명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기계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니 더 이상 머리 쓸 것이 없어 머리가 텅텅 비어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전화번호를 많이 외웠지만 지금은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스마트폰에 다 저장되어 있으니 외울 필요가 없는 거죠.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 안내해 주니 더 이상 길 떠나기 전에 지도를 찾아보거나 어떻게 가야할지 전혀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죠. 편리하기는 하지만 우리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정신건강을 해치고 치매를 더욱 더 앞당기고 있다고 전문가들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일 전에 모 통신사를 이용하는 휴대폰들마다 한 동안 먹통이 되어 그 먹통이 된 시간 동안 개인의 삶이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지 휴대폰이 몇 시간 통하지 않으므로 개인의 삶이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린다면 이는 분명 기계의 노예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기계가 작동되어야 내 삶이 움직인다면 그건 바로 내가 기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극이죠.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런 특징이 있고 우리의 대적 사탄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 활용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복잡하고, 심각하고, 생각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귀찮아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인내력도 잃어버리게 합니다. 대단히 조급하게 만듭니다. 실증을 빨리 느끼도록 부추킵니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부터 1백년 이상 앞서 살았던 정신분석학자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상상이나 해 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가 살던 시대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마귀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신앙적으로 위험한 시대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특징들은 다 신앙의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신앙은 머리에서부터 생각하여 마음에 이르게 하고, 그 마음에서 더 깊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신앙의 활동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묵상이거든요. 묵상을 해야 머리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영혼으로 연결이 되는데 이 묵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아사 직전에 있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묵상은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의 옵션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묵상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묵상을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 참선... 이런 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명상과의 분명한 차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동양사상에서 명상, 선... 이런 것은 철저히 비우는 것입니다. 무념, 무상... 이것이 동양의 명상, 참선의 핵심입니다. 다 비움으로 해탈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갈등, 욕망, 자기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다 비움으로 얻게 되는 해방감입니다. 여기에는 부담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비움은 마귀로 하여금 틈타게 합니다. 그래서 비움과 해탈을 강조하는 노자사상 끝에는 성적인 유희로 나아가게 되죠. 비우니까 자유롭다는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무책임입니다. 그 무책임의 극치가 약물, 성정 중독... 이런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인도의 라즈니쉬 같은 이런 사람들이 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명상은 성경적으로 볼 때 위험합니다. 


    성경적 묵상도 처음에는 비움으로 시작합니다. 죄를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시기, 질투, 분노, 욕망.... 이런 것들을 다 비웁니다. 왜냐하면 이게 다 죄이고, 이런 죄의 비움이 없이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를 비우고 나면 그대로 비운채로 두면 안 됩니다. 자리가 비어져 있으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주인이 되죠. 그런데 그 자리를 새로운 것으로 채워두지 아니하면 다시 마귀가 틈타게 됩니다. 오히려 비우기 전보다 더 강한 일곱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형편이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오셔서 마음의 성전이 되게 하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 성령의 인도함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묵상의 축복


    오늘 본문에 보면 묵상의 축복을 잘 말씀해 주고 있는데 간단히 오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상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심을 바로 잡습니다. 1절에 보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권모술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원리원칙과 정직 보다는 이기기에 힘쓰며 또 이기기 위해서는 온갖 모략과 술수, 거짓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악인의 꾀입니다. 또 죄인의 길이라고 했는데 이는 죄인들이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이는 세상의 유행이요, 트랜드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는 길을 좇아 사는 것이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법이니까 자기 판단에 의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누가 어디에 줄을 서나... 이걸 보고 그 길로 가는 거죠. 예수님은 이 세상에 두 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넓은 길로서 그 길이 넓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가는 길인데 이는 결국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고, 둘째 좁은 길로서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들이 많지 아니한데 이 길이 바로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흐름, 유행... 이런 것 쫓지 않고 중심을 바로 세우는 사람이 바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니까 무엇을 결정할 때 세상의 환경, 악인의 꾀... 이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 말씀 위에 중심을 굳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나무가 시냇가에 심기웠다는 것은 비가 올 때나 가뭄의 때나 항상 물을 받아드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무에게는 홍수의 때가 있는 것처럼 가뭄의 때가 있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보면 행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뭄의 때에도 시냇가에는 물이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심기워진 나무 보다는 시내가에 심기운 나무가 가뭄을 덜 타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교제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가뭄의 때, 즉 고난의 때가 되면 표시가 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은 어려움의 때에도 흔들림 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던 사람들은 어려움의 때가 되면 표시가 납니다. 4절에 보면 “바람에 나는 겨”처럼 다 고난, 환란의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의 때, 환란의 때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 그 사람의 신앙을 다 파악하게 됩니다. 아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되죠.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알이 차지 아니하니까 바람이 불면 홱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셋째,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 잘나서 인정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 가까이 하려고 힘쓰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이 그걸 인정해주신다는 거죠. 사람이 누군가를 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어떤 사람이 차 사고로 경찰서에 갔다고 합니다. 경찰서에 가서 사고 경위를 쓰고 하는데 그 맞은 편 옆자리에 아는 분이 과장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저 잘 아는 분도 아니고 운동하면서 인사 정도나 하는 분이었는데 이 분이 조금 힘을 써 주시니까 수월하게 일이 잘 풀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될 때가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것이 큰 복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기도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이요, 예배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이요, 은혜의 문, 축복의 문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때가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는 자, 씨름하는 자... 이런 자를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를 복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상을 통해 꾸준히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유지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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