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한복음 13:01-11) [사순절 시리즈]
  • 2014.03.22 17:15:08
  • 요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잡시시기 전의 일들을 아주 자세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는 ‘예수님의 고별사’ 라는 별명이 붙고, 이를 마무리 짓는 17장은 마치 이 고별사 뒤에 기도로 마무리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입니다. 그리고 18장에서부터는 성만찬과 겟세마네 기도로 이어지는 고난의 밤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몇 일 동안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요한복음 13장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잡히시던 그 순간인 18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그의 생애 마지막에 행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 행하신 일들이나 가르침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들임에 분명합니다.


    우리가 만약 앞으로 일주일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꼭 필요한 일들을 하겠죠.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일주일 앞두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일들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오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를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일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제자들을 향한 더 강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3장을 사도요한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이제 이 땅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니 그 사랑이 더 애틋해지고, 더 간절해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나라에서 살다가 한 일주일 뒤에 다른 나라로 이민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부모, 형제, 친구들이 얼마나 그리워질까요? 그러니 일주일 내내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해지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모습 속에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2절에 보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이 가룟 유다도 제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는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저 놈은 날 파는 놈이니까 원수 같은 놈이다, 마귀의 자식이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가룟 유다는 제외시켰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되, 언제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까? ‘끝까지...,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끝까지 가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귀합니다. 더군다나 나를 배신하고, 나를 헤치는 자에 대해서까지 끝까지 가는 사랑이 있을까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최후의 만찬까지 예수님과 함께 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사랑한 것...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끝까지 품고 사랑하는 마음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이 아닐까요?


    얼마 전에 우리 교인 중 한 분이 제 스마트폰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라는 제목으로 한 삼성연구원 부인이 쓴 글을 보내주셨는데 제가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이 부인은 집을 너무 잘 꾸며 잡지에도 몇 번씩이나 집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사진들과 글이 실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나가던 삼성 연구원 남편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그 궁궐 같이 멋진 자기의 집은 아무 소용도 없고 단지 몇 평도 채 되지 않는 병실과 간이침대만이 자기가 누울 곳이었다고.... 그리고 평소에는 그렇게 멋을 부리던 옷들도 그 상황에서는 더 이상 자기의 옷이 아니라 간편한 추리닝 바지와 래깅스 하나 만이 자신의 옷이었더라고....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남편도, 아이들도...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것이 아니라는 간절한 깨달음이 옵니다. 더 나아가 절망도, 불안한 미래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그러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삶(BIRTH)의 B와 죽음(DEATH)의 D 사이에 끼어 선택(CHOICE)하는 C일 뿐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온 몸으로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을 선택하겠노라고.... 그래서 남편이 죽음을 이기고 걸어 나온 나사로처럼 씩씩하게 병실을 걸어 나올 것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예견하는 병 앞에서도 한 인간이 이렇게 겸허해진다면 진실로 죽음 앞에 설 때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어느 사람인들 겸허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겉 사람이 낡아질수록 그 반비례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니 자연히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용서하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천국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가 보이고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육체가 아주 무너질 때면 새로워진 그 심령은 옛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주님과는 달리 우리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닙니다. 한 20년 남았습니까? 그러나 그것마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마저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후회 없는 인생이 되도록 뜨겁게 사랑합시다. 기왕 시작한 사랑... 끝까지 사랑합시다. 신앙의 정수는 자기 의도 아니고, 거룩도 아닙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주님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만이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패배자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섬김의 행위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패배주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다 겁쟁이가 되어 도망가 집 속에 꽁꽁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의 열 두 영들도 더 되는 천사들을 호령하여 악당들을 단숨에 물리칠 것을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세상의 정복자들이나 하는 것이요, 섬김을 받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복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등하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고 인간으로 오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온전히 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비우기까지는 얼마나 힘이 들까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 인간의 형체를 하시고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세상을 섬기고 자신을 비우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할 때 그 십자가는 섬김의 상징입니다. 그것도 그냥 섬긴다는 정도가 아니라 죽기까지 섬긴다는 섬김의 최대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섬긴다면 우리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섬김에 한계선을 그어놓습니다. 이 정도만 섬긴다... 그 이상은 안 된다.... 그런데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그 선은 도대체 누가 그어놓았습니까? 예수님이 그 선을 그어놓았습니까? 성경이 그 선을 그어놓았습니까? 십자가가 그어 놓은 섬김의 정도는 죽기까지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죽는다는 각오로 한다면 못 이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우리 스스로 그어놓은 그 한계치의 선들을 지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한계선을 지우고 죽기까지 섬기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다가올 고난의 때를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하여 서로를 향한 섬김으로 극복하고, 그러한 섬김으로 하나가 되어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4-8절에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고난을 극복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 상황을 좀 설명해드리자면 데살로니가교회가 사도 바울이 짐작한대로 심한 고난 중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너무나 중하여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었습니다. 상황을 돌아보고 도와줄 것이 있는가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들려지는 소식에 의하면 바울의 염려와는 달리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똘똘 뭉쳐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과 사랑’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다 극복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초대교회들도 믿음과 사랑으로 고난과 환란을 이겨냈습니다. 이 믿음과 사랑은 어려울 때 서로를 섬기는 힘입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고난을 이겨내니 이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 바울의 일행에게도 대단히 큰 위로가 됩니다. 


    고난 가운데서는 작은 원망과 불평도 큰 힘을 발휘하여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난 가운데서도 누군가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기 시작하면 이 작은 섬김이 크게 흔들리는 공동체를 굳게 세우는 강한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강해진 이유는 고난 가운데서 고난의 이유를 찾지 아니하고 그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서로 힘을 합하여 기도하며, 섬기며 고난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 41절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더라...” 그랬고, 사도행전 4장 32절에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듯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가 극한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그렇게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의 섬김의 정신이 사도들에 의해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큰 힘으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먼저 섬기겠다고 나선다면 그 어려움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만나는 내 인생, 내 공동체, 내 가정을 더욱 더 든든히 하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제자들처럼 섬김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이 어려운 때를 능히 극복하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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