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숙한 감사2(하박국 3 : 16 - 19)
  • 조회 수: 197, 2013.05.06 07:49:45
  • 얼마 전 조선일보 논설 위원인 이규태씨가 그의 글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병은 “감사 결핍증”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돌아설 때 “감사하다”는 말 대신 “또 오십시오”라고 하며 이기적인 인사로 합니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 “야, 신난다”라는 말이 앞섭니다. 택시 정류장에서 바빠서 발을 동동 구는 사람에게 차례를 양보하면 고맙다는 말을 듣기기 어렵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그리고 많은 경우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사의 나라 영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국 사람의 감사의 태도와 한국 사람의 태도를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감사의 말을 잘 합니다. 이들이 일상 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말 50개 중,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 “감사하다”라는 말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도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합니다. 신문 한 장을 사도 감사, 과일 한 개 사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물건을 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는 사람도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내가 너의 물건을 사주는데 내가 무슨 감사를 하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럴 때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상점이 나로 하여금 이 물건을 살 수 있게 준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만일 상점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물건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의 감사가 이렇게 생활화 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미개하였던 엥글로 색슨 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친절과 감사의 나라, “신사의 나라”라는 별명도 붙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는 감사가 풍부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나 미신에는 우리와 같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간절한 기도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게 되면 감사를 많이 하게 됩니다. 전에는 감사할 일이 아닌 것도 감사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불평했던 일도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로 인해 나의 시각이 바뀌게 되니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제목이 되더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잃어 버리고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감사의 정신입니다. 세상이 악해지고 마지막 때를 향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강팍해 져서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12). 또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라고 하며 감사가 없는 현상이 말세의 징조하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타락한 시대요, 마지막 시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는 속담이 말해 주듯이 사람들은 은혜를 입고도 감사를 하지 않거나 쉽게 잊어 버립니다. 은혜를 베푸는 입장에서는 희생을 하는데 받는 입장에서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이처럼 각박한 이유도 사람들이 감사를 잘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더욱 더 높아지는 것도 서로 고마운 마음을 주고 받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메마른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하겠습니까? 감사를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겠습니다.

     

    감사를 잘 해보십시오. 우선 나의 마음이 기쁩니다. 감사를 받는 상대방의 마음이 흐믓해집니다. 그리고 감사를 잘하면 가정이 화목해 집니다. 교회가 훈훈해 집니다. 이웃과 좋은 관계가 됩니다. 살 맛나는 사회가 됩니다. 반대로 불평과 불만을 해 보십시오. 먼저 내 마음이 삭막해 집니다. 감사 받기를 기대하였던 상대방의 마음이 닫혀집니다. 그리고 가정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냉랭해 집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나빠집니다. 사회가 어두워집니다. 감사는 마치 기계에 있어 윤활유와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매사를 부드럽고 매끄럽게 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기계에 기름칠을 안한 격이 되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부서지는 것과 같이 감사가 없는 인간 관계는 마지막에 가서는 깨지게 됩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어려워집니다.

     

    여러분! 신앙과 감사는 서로 비례합니다. 신앙이 있으면 감사를 하게 되고 감사를 하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감사가 빠져 있으면 그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종은 칠 때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만일 종을 힘껏 쳤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으면 그것은 종이 아닙니다. 그저 쇠 덩이에 불과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신앙의 종에서 감사의 소리가 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신앙은 겉만 번지르한 병들어 있는 신앙일 것입니다. 나의 신앙 생활에서는 감사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나오고 있습니까? 불평,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은 감사를 잘하는 건강한 신앙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있는 신앙입니까? 감사 생활을 통해 신앙의 건강도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감사하는 태도를 보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감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고도 입을 싹 씻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배은망덕, 즉 은혜를 잊은 사람이라고 하며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 맛지 족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주둥아리를 닦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닭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닭은 먹을 때는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습니다. 그러나 먹고 나서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듯이 주둥이를 땅에 쓱 닦습니다. 맛지 족은 닭의 이런 염치 없는 행동을 본떠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주둥아리를 닦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1860년 한 척의 배가 미국 미쉬간 호수에서 폭풍우로 인해 침몰되었습니다. 이 때 스펜서(Spencer)라는 한 학생이 용감하게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무려 17명을 구출해 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건강을 잃게 되어 얼마 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펜서의 장례식에는 그가 살려낸 사람 가운데 그 누구 하나도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습니다. 자기 생명을 구출해낸 사람의 은혜에 감사는 커녕 기억도 못했습니다. 물 속에서 의식이 아득해져 갈 때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아, 이제 나는 죽나보다. 나를 살려줄 사람이 없나. 살려만 주다면 정말로 그 은혜를 잊지 않을 터인데.” 그러나 막상 살고 나니 그 생각은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사람은 “동”누러 가기 전과 “동”눈 후의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저가 “동” 발음을 좀 세게 하면 이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그냥 약하게 “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용무가 급하나 화장실이 없어 해결을 하지 못할 때는 별, 별 생각을 다합니다. 몸을 비비 틀며 비지땀을 흘립니다. 온통 생각은 화장실 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피하고 싶었던 화장실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습니다. “오, 나의 사랑 화장실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요즈음은 공중 화장실이 잘 마련되어 있어서 이런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만 공중 화장실이 없었던 옛날에는 흔히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화장실이 마침 눈에 띠었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나는 듯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시원하게 용무를 보았습니다. 보고 나니 그렇게 간절히 찾았던 화장실이 이제는 보기도 싫어졌습니다. 가기 전에 가졌던 그 간절한 생각은 어느 듯 다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눈 앞에 문제와 어려움이 닥칠 때는 하나님께 수 없는 다짐과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 이번에 이 일만 해결해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어떻게 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Please! Please!” 그러나 막상 일이 해결되니 언제 내가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입을 싹 씻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우리 아이의 문제만 해결해 주신다면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해결되니 딴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것인가? 내 아이가 똑똑해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 이 번 사업만 성공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내가 평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겠습니다. 사업이 성공했습니다. 돈도 꽤 벌었습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어서 이렇게 된 것인가? 내 사업 수완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과거 하나님께 이런 다짐이나 맹세를 한 적이 없습니까? 그 때는 간이라도 빼어 드릴 것같이 하면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습니까? 손발이 달토록 애걸 복걸 빌지 않았습니까? 금식을 하며 떼를 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하도 애타게 간청하기에 불쌍해서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그리고 그 때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맹세하였던 것이 아직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맛지 족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둥이를 닦는 사람”아니 다름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즉 감사의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이 번창을 해서 감사합니다. 건강해서 감사합니다. 자식이 공부 잘해서 감사합니다. 가정이 행복해서 감사합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해서 감사합니다. 학위를 취득해서 감사합니다. 바라던 일이 이루어져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감사해야지요. 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사를 합니다. 이럴 때 감사만 잘 해도 정말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야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를 입고도 모른척하는 괘씸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어의 “Thank”, 즉 “감사하다”라는 말은 “Think”, 즉 “생각하다”라는 말과 그 어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생각할 때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감사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부디 잘 생각해 보시고 감사를 잘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를 잘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감사를 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십니다. 나는 별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안 받은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한 번 받은 것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 그를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영국의 성공회 감독 트랜취는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만 구덩이만 있어도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는 어둡고 험한 길에 조그만 빛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인생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냐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딱지만한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조지 무어라는 사람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말고 당신이 받아 마땅한 벌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하 감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불평의 눈으로 보면 불평할 일이 수두룩합니다. 불평을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나는 왜 요렇게 생겼나?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나? 왜 똑똑하지 못하나? 왜 우리 가정은 요 모양 요 꼴인가? 왜 내 부모는 저 정도 밖에 못되나? 왜 내 남편은 저렇게 무능한가? 왜 내 부인은 복부인이 되어 돈을 벌어오지 못하나? 왜 내 자식은 저렇게 지질이도 못 낫나? 왜 우리 교회는 이런가? 왜 우리 교회 목사님은 저렇게 하나? 모든 것이 다 불평 깜입니다. 그렇지요?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러나 감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들입니다. 자, 보십시오. 가정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자식이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부모가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부모가 있음이 감사합니다. 일할 곳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현재 일할 곳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영국에 오고 싶은데 오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영국에 사는 것이 감사합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보니 킹스크로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눈으로 보니 조금 전에 불평하였던 것들이 다 감사할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는 현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현재 나의 형편, 처지, 입장, 환경, 상황 등이 불평의 재료가 될 수도 있고, 감사의 제목이 될 수도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모두가 파랗게 보입니다. 또 빨간 안경을 쓰고 보면 빨갛게 보입니다. 불평의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것이 불평할 것뿐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감사의 안경을 끼고 보시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행복한 삶을 원하시지요? 지금부터 당장 감사의 안경을 쓰십시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는 불행 중에서, 고난 속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고차원적인 감사이며 성숙한 신앙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가 이런 감사입니다. 도저히 감사라고는 할 수 없는 처지와 여건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하라고 하면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을 환경에서 그는 기뻐했습니다. 정말로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찬양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어려운 때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부 관리들은 타락과 부패를 일 삼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국제 정세까지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지금까지 형님 나라로 의지하고 있던 애굽은 이제 국운이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유다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신흥 제국 바벨론은 강대국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시시 탐탐 유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멀지 않아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 나라를 침략해 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유다는 내적, 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선지자로서 누구보다도 이런 급박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하박국은 가슴이 떨렸습니다. 두 다리에는 힘이 다 빠졌습니다.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를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해 보셨는지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상해 보면 어떤 처지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드디어 침공해 왔습니다. 그리고 국토를 황폐하게 했습니다.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 감람 나무의 열매들은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외양간의 소는 끌려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었던 양들은 그들이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을 부지하는데 필요한 양식마저 구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극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하박국은 감사를 했습니다. 찬양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전쟁이 나서 국토는 유린당하고 먹을 것을 떨어졌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3:17).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 있을까요? 하박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서 힘찬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9). 역경과 환란은 오히려 하박국의 믿음을 더 높고,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환란과 역경 속에서 감사를 할 수 있다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사가 형통할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때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환란 속에서 감사와 찬양을 한다는 것은 고도의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를 할 때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 더욱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승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우리 이런 성숙한 감사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나도 한 번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도구가 되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를 함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하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전도할 때 일이었습니다. 그 도시에 귀신이 들려 점을 쳐서 자기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던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바울을 쫓아 다니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그 귀신을 좇아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종의 주인이 이제 돈 줄이 끊어진 것을 알고 화가 나서 바울을 당국에 고소했습니다. 관원들에게 붙잡혀 심한 매를 맞고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는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발은 착고에 채워졌고 아까 채찍에 맞은 자리에서는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매우 쓰리고 아팠습니다. 신음 소리와 함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나와야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위해 일을 했는데 고작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찬양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옥 터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옥문에 열리고 착고가 풀렸습니다. 죄수가 도망간 것으로 오해한 간수는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죄수가 탈옥을 하면 대신 간수가 심한 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대로 여기 있으니 죽지 말라”고 바울이 소리쳤습니다. 이것을 본 간수는 하나님의 능력에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 말대로 그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바울과 실라는 옥에서 풀려났습니다. 하나님은 감사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찬양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여호사밧이 유다 나라의 왕으로 있을 때 모압과 암몬 연합군 수 십만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약한 유다는 도저히 그들과 맞싸울 수 없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온 백성들과 더불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마주 나가서 싸우라는 하나님의 응답이 임했습니다. 여호사밧이 백성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성가대를 조직하여 앞세웠습니다. 적군을 향해 나가며 성가대가 찬양과 감사를 했습니다. 역대하 20장 21절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며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 20:21).

     

    아니, 세상에 전쟁에 임해서 싸움은 할 생각은 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전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보니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온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20:22). 이겼습니다. 유다 백성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감사가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미국에 예수 잘 믿는 목재소 직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경제가 나빠 불황 속에 빠져있을 때인데 해고 통지서가 날아온 것입니다. 우리 중에 직장 생활을 했거나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지만 남자에게 있어 직장에서 해고 당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요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분들이 잘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쫓겨 나는 것을 보는데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고 통지서를 받은 이 사람은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당장 먹여 살릴 가족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따지듯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런 어려울 때 직장을 잃게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믿어 왔는데 이런 시련을 주시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한참 동안 낙심과 좌절과 불평 속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직장에서 쫓겨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하면 할 수록 걱정, 근심이 없어지며 마음이 기뻤습니다. 일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얼마 동안 지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여관을 시작하면 어떠하겠냐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목재소 직원으로 오랜 동안을 일을 했기 때문에 여관을 지을 나무를 외상으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관을 짖고 나서 그 이름을 Holiday Inn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 체인을 갖고 있는 호텔 Holiday Inn의 시작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장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어떻게 닥칠지 모릅니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질지,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업에 어려움이 있을지, 잘 다니던 직장에서 문제가 있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하박국이나 바울과 같은 감사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런 감사가 하박국이나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주시는 말씀은 나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런 감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성숙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어려운 시련과 고난 속에 놓여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숨과 슬픔이 변하여 찬양과 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 드리는 찬양과 감사를 더욱 값지게 보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역사를 하십니다. 지금 내가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평탄하고 형통한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내가 수완이 좋아서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룬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이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을 다시 취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습니다. 내가 감사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감사를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아무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어찌 버리겠습니까? 이 믿음을 가지시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이 잘 되어갈 때나 잘 되어갈 때나, 하나님께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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