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넣어보라(요 20 : 24∼29)
  • 조회 수: 245, 2013.06.22 21:41:20
  • 안녕하십니까? 22구역 강은애입니다. 하루는 남편이 구역장 공부를 마치고 와서 20만원 수표를 내보이면서, 교회에서 달란트를 주었는데 무얼해서 남기지?" 하는 거예요. 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름치마 장사나 할까?" 했지요. 저는 정식으로 배운 일은 없지만 취미 삼아 제 옷을 만들어 입곤 해서 주름치마 정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있었거든요.

    구역 식구들과 의논한 결과 저는 생산을 담당 하고 다른 여집사님들은 보조, 남자 집사님들은 어느 한날을 잡아 양재역 부근에 좌판을 벌리고 판매를 담당하자고 했습니다.

    우선 20만원을 가지고 중고 오바로크 기계를 15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재봉틀밖에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바로크 기계가 필요했던 거지요.

    그 다음은 동대문 광장 시장 단골 가게에서 자투리 천을 샀습니다. 한벌 만드는 재료비가 15,000원 들었습니다. 판매가를 3만원으로 잡고 우선 샘플로 제 옷을 해 입고 나타났더니, 그때부터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 집사님들의 좌판 장사 꿈은 사라지고 곧 바로 주문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5월부터 7월까지 150벌, 이익금은 225만원이었습니다. 구역 집사님들이 오셔서 일손을 도와 주셨지만,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집사님들은 다른 사업을 하기로 하고 각기 사는 아파트에서 티셔츠 장사를 해서 남긴 이익금이 27만원, 1학기 마치기 전에 총 이익금이 252만원이 되었습니다. 8월 한 달은 너무 덥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서 쉬었습니다. 한 달을 쉬면서 제 마음에는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하는 마음과 `아니야, 이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닌데……'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300만원은 채워야 하겠다는 욕심이 생겨 이번에는 긴팔 블라우스와 주름치마 몇 벌만 주문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총 수익금이 280만 2천원, 원금까지 합쳐 300만 2천원이 되었습니다. 일 등을 하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등수와는 관계없이 그저 주문에 맞추느라 열심히 바느질만 했는데 일등이 됐더군요.

    그 동안 백화점에 보내시지 않고 주로 도매시장으로만 보내며 훈련시키시더니, 이번에 달란트 훈련을 별 어려움 없이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한 분 한 분에게 어울릴 만한 천을 고르고 옷을 만들면서 형편과 사정은 잘 모르지만,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제게는 큰 은혜였습니다. 전문가도 아닌 저를 믿고 옷을 구입해서 예쁘게 입어 주신 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이구요. 구역 식구들과도 시장을 같이 다니고 바느질을 함께 하며 남다른 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 일을 다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보너스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바느질하느라 엉망이던 집안을 잘 참고 견뎌 준 남편에게 주신 병 치료의 역사입니다. 작년 말부터 성대에 혹이 생겨서 3월에 수술을 했는데, 5월 - 바느질로 한창 바쁠 때 재발이 된 것입니다.

    아나운서 직업의 생명인 성대에 고장이 생겨,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걱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재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다니는데 수술 날짜가 자꾸 지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화장품 회사를 경영하시는 권사님께서 자신의 회사 화장품 원료로 사용하는 천연 물질을 먹어 보라고 하시면서 한 병을 주셨어요. 이것을 먹으면서도 될 수 있으면 빨리 수술을 끝내려는 마음으로 구로 고대병원, 이대 목동병원을 거쳐 영동 세브란스까지 왔는데, 수술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니까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정상 근무를 못하고 있는 상태라 답답해했지만, 저는 수술 안하고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리란 확신이 들더군요.

    그래서 모든 걱정 접어 두고 열심히 바느질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느질이 다 끝난 후 10월 23일, 마지막 검진 결과 혹이 다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저에게 직장을 주셨습니다. 25년간 묵혀 두었던 양호교사 자격증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임시직이긴 하지만 전혀 새로운 기분으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고등학교 양호실의 아늑한 공간에서 성경 말씀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바느질하느라 소홀히 했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그 공간에서 열심히 읽어 지난 주말까지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는데 중간에 꾀를 피웠던 것입니다.

    이번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 주신 많은 달란트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했느냐를 물으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삶을 낭비하는 일없이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이다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하는 칭찬을 듣기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12구역 구역장 윤좌원 집사입니다. 달란트 훈련을 위해 준비된 하얀 봉투를 받는 순간부터 저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아닌,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려는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이란 바로 나 자신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으론 우상화 시켜 놓은 "교만" - 그것이었습니다. 안내 1부장과 중등부 부장에 구역장, 그것도 매년 1∼3등 안에 드는 구역장인데, 달란트 훈련 과정 정도야 졸업한 셈 아닌가? 그리고 성경 말씀을 앞세우고 선한 우리 교인들에게 이런 일까지 시키시다니, 목사님도 잘못 생각하실 때가 있구나 - 그렇게 생각한 채로 그 봉투는 받는 순간부터 검은 제 가방 속에 집어 넣어진 채 6개월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구역 식구들이 여러번 걱정을 할 때에 저는, "구역 공부만 열심히 하십시다" 하고 무시했었습니다.

    어느 주간 구역공부 때는 여호수아의 유언에 대해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름다운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을 때 그들에게 3번씩이나 부탁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아니하면 이 아름다운 땅에서 쉽게 멸망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던 저야말로 나 자신을 우상화해 가고 있었던 것을 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6개월을 보내고 달란트 열매들을 교회 앞에 돌려 드리는 시간이 다가 왔습니다. 저도 태연하게 곱게 넣어 두었던 봉투를 돌려 드리려고 목사님 한 분에게 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 그 목사님은 어느 교인 한 분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급한 성격대로 5분여를 못 기다리고 구역 공부하는 방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 주에 다시 그 봉투를 돌려 드리려고 가방에서 찾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봉투가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설마 설마 했으나 결국 그 봉투는 나타나지 않았고, 저는 억울한 마음으로 제 봉급에서 그 돈을 돌려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저에게 주신 1달란트를 뺏어 가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 돈이 아까운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은 두려운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그냥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나에게 그런 일이 직접 일어나다니…….

    그러다가 제 마음은 공포로 변해 갔습니다. 성경에 있는 그 숱한 하나님의 약속, 경고 그리고 주님의 비유들이 모두 다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1달란트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다른 달란트도 하나님께서 다 뺏어 가실수도 있다는 얘긴데, 만약 내 회사의 직위, 내 집, 내 사랑하는 가족들 마저 빼앗아 가신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며칠 동안 저는 성경을 쳐다보기도 두렵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더 무서웠습니다. 아직도 죄악 가운데 저는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중 어느 날, 불현듯 희망의 빛이 조금 비치는 듯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서 한 달란트를 뺏어 가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역사하시는 것이고, 그 사실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역사 하고 계신다는 말이겠구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뺏어 가시는 일만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나에게 이미 주신 다른 달란트를 잘 쓰기만 하면 더 주시기도 하시겠구나. 아니 또 다른 달란트를 새로 주실지도 모른다. 겨우 한 달란트를 뺏어 가심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귀한 진리를 나로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구나.'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저는 두렵고 무서운 생각은 깨끗이 지워버리고 저에게 주신 달란트를 절대로 뺏아기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와, 또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달란트를 맡겨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찬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지난봄부터 10월말까지 우리 교회에서는 `구역별 달란트 훈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써 우리가 과연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을 성찰하고 또 재정립하기 위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는 훈련이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두분의 간증을 방금 들어보았습니다. 한분의 간증은 가장 많은 열매를 거든 구역의 간증이고 나머지 한분의 간증은 전혀 열매 맺지 못한 구역의 이야기이기에 두 분의 간증은 전혀 상반된 내용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강은애 집사님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달란트를 조금이라도 더 잘 갈무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방송인인 남편의 고장난 성대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무려 25년 전에 받아 두었던 양호교사 자격증을 활용할 수 있는 귀한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결코 멀리 게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양호교사 자격증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적절하게 고치시고, 또 활용할 수 있도록 반드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윤좌원 집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과 명분에 의거하여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구역식구들이 `달란트 훈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결과적으로는 봉쇄해 버린 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맡겨진 달란트의 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운이 나빠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와 같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것을 하나님께서 빼앗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시는 분이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실은,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두 집사님의 간증은 외양상으로는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핵심은 동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긴 달란트의 양에 상관없이 이번 `달란트 훈련'을 통하여 우리가 두분처럼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나와 언제나 동행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확인하고 경험했다면, 이번 `달란트 훈련'은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변화요, 진정한 변화는 바로 이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감사도, 순종도, 자기 부인도, 성숙도 오직 여기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 채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문들을 걸어 잠군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 한심한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친히 찾아오시어 당신의 부활을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그 감격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만은 그 현장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타난 도마를 향하여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그러나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 속에 장사 지낸 바 된지 사흘이나 지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b)

     

    주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직접적 사인(死因)이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그 자국에 넣어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뵙지 못했던 도마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마가 이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마는 그렇게 말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곳에 있는 도마를 발견한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다가가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친히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27a)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마가 그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주장했는지, 무엇을 요구했는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마가 원했던 대로 도마의 눈앞에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도마로 하여금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손가락을 내밀어 주님의 상처자국에 넣어 보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도마는 새삼스레 자신의 손가락을 주님의 상처 자국에 넣어 볼 이유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언행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자신이 요구한 상처자국을 보여 주시는 분이라면 그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시오, 성자 하나님이심에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처럼 언제나 자기 곁에 계시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의심많던 도마는 위대한 사도, 다시말해 진정한 감사와 순종 그리고 자기 부인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성숙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나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 자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을 한 사람만 선택하라면 우리는 주저없이 다윗을 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족보를 통하여 오실 만큼,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신앙인 중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처럼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을 그 자신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직접 지은 시편 139편 1절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여기에서 `감찰한다'는 동사는 탄광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써, 채광 작업을 할 때 행하여지는 정밀 작업을 의미합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광산 속에 무엇이 정확하게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갱도 속으로 들어가 정밀 조사를 하는 자는 그 깊은 속까지 샅샅이 알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깊은 곳까지 낱낱이 살피시고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아신다'는 단어는 동거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디를 가든 자기와 함께 동거하시며 자기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 자신의 모든 생각, 자신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입밖으로 아직 발설되지 않고 혀끝에서 맴돌고 있는 말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며 언제 어디서나 나와 동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다윗이 확연히 알고 믿었을 때, 한순간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던 다윗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날로 날로 하나님 앞에서 성숙하게 변화 되어 갈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셔도, 다윗이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거나 알려하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지난 목요일(97. 12. 18)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이기에, 야당의 집권은 갑자기 야기된 IMF사태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예견케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우려하는 사람들 역시 상당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발전이란 관점에서 볼 때, 여야간의 정권교체란 필수적인 것이기에 이와 같은 변화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런 외적 변화가 아니라, 당연히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동도 않는 우리의 내적 변화입니다. 내적 변화가 없다는 것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직까지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증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의 삶이 바로 세워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열흘만 지나면 또 한 해가 사라집니다. 이 한해를 뒤돌아보건대 연초에 비하여 우리는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우리 각자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없다면, 이 사회에 아무리 외적 변화의 바람이 몰아 닥쳐도 이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화될수는 없습니다. 이 사회의 본질은 정당이나 체제 혹은 제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인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은 25년전 양호교사 자격증을 땄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것을 활용케 하신 강은애 집사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계십니까? 윤좌원 집사님과 함께 하시면서 집사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고, 그의 잘못된 삶을 바르게 교정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있습니까? 다윗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고 다윗의 혀 끝에 맴도는 말까지 알아들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대강절 네째 주일을 맞이하여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그 분 앞에서, 그 분을 힘입어,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다가오는 외적 변화를 두려워함이 없이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변화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도마처럼, 다윗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우리 삶의 키를 온전히 맡겨 드립시다. 그 분으로 하여금 우리 인생의 선장이 되게 하십시다. 그때 1998년은 이 사회가 본질적으로 새로워지는 진정한 새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나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고 언제나 나와 동거하시는 주님.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 날마다 변화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이 사회의 본질이기에 우리가 변화되는 만큼만 이 사회의 본질이 변화됨을 잊지 않게 해 주옵소서. 도마와 다윗이 내적으로 변화되므로 그 시대가 새로워 졌던 것처럼, 외적 변화를 두려워함이 없이 우리 자신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되므로, 1998년이 이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진정한 새해로 다가오게 해 주옵소서. 나의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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