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살게하신 하나님(행2:23-36)
  • 조회 수: 379, 2013.06.25 07:26:58
  • 영국의 비평가요 사상가인 존 러스킨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티끌의 윤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진흙을 들어쓰신다면 무엇이 될수 있을까?”
    그는 그 질문의 결론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래와 흙과 물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힌바 될때에 사파이어가 될 것이다. 모래가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힌바 되었을때 오팔이 될 것이다. 맨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힌바 될때에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다. 그렇다. 나같은 사람, 티끌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될때 다이아몬드 처럼, 사파이어 처럼 귀하고 값진 보석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위에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인생을 변화시키시고 가치있게 만드시는 복된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다윗왕의 예언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감동해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고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음부의 버림을 받지 않으시고 육신도 썩지 않을뿐 아니라 부활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 졌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예언을 통해서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32절에“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지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 예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34-35절에 다윗은“주께서 내 주(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하나님이) 네 원수(마귀)로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도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도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원수 마귀를 밟게 될때 까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지배할 만한 모든 것들을 예수님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권세자 같지 않았습니다. 많은 호위병들과 장관을 거느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잠잠하게 있다고 했습니다.

    왕의 옷을 벗고 평민의 옷을 입었습니다.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아무에게도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세상의 지배자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2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기사와 표적을 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이나 권력자들은 할수 없는 그 권능과 기사와 표적 말입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한번도 그 대가를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부자가 되거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보고 지도자가 되어달라, 왕이 되어달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5장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누구라고 하느냐?”

    “선지자요, 엘리야라고 하거나 또는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나타난다고 합니다.”라고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찬사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는 구세주이신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체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게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참 성도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예수님은“내가 그로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하며 다닌다고 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예수님이 그 능력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고 가짜 메시아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인을 죽이므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시라면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죄인을 벌내려서 죽게 하고 의인은 상을 줘서 높은자가 되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자 하늘의 불이 내려서 죽이려한 것 처럼 그렇게 하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잘 먹고 잘 사는 부자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놓고 누리시는 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처럼, 권력자 처럼 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그런 왕들과 대통령들에 의해서 나라가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지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런 메시아와 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잘 다스려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 그들 밑에서 혜택을 보았던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잘 살았습니다.

    세상에 안되는 것 없도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세상돈이 모두 자신의 돈인것 처럼 생각하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청문회가 시작되자 그들의 죄가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감옥에서 살고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땅의 메시아는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인줄 아셨습니다. 왜 우리가 못사는 지를 아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귀신처럼 살다가 슬피 울면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길한 어두움이 사람들 누구에게나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셔서 사람들 속에 있는 저주의 사슬을 끊어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과거에는 흠없는 짐승을 하나님앞에 제물로 바치므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의 저주의 사슬이 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이 마저도 시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친히 저주의 사슬을 끊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깨끗한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23절에“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하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자의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힘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님을 죽게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제물로도 사람들의 죄를 대신할수 없었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흔 것으로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기 까지는 3일이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 갈때 사흘길을 여행했습니다. 외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려는 고민과 통탄과 슬픔과 어두움의 시간이 삼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 올랐을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그의 죽음을 부활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나는 3일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광명을 찾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하나님께서 구덩이 속에 두셨다가 내 생명을 건져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돌로 막힌 무덤에 3일동안 갇혀있었습니다. 로마의 군대가 황제의 이름으로 사흘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세상의 지배를 받는 권력들도 승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31절에“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 속에서도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24절에서는 사망의 고통을 푸셨다고 했습니다. 사망의 고통이라는 말은 “오우디나스”라는 말로 해산의 고통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냥 고통이 아니라 해산의 고통입니다. 새 생명으로 잉태하는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갈4:10에는 예수님이 해산의 수고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실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의 수고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죽음 권세를 이겼다는 것, 세상의 권세도 이겼다고 하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그 속에서는 새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2:32에서“내가 땅에서 들리면(부활하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땅에서 부활로 들리시니 해산하듯이 새 생명이 태어나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자석을 쇠붙이에 대면 쇠붙이가 딸려 오듯이 예수님이 사망의 고통에서 일어나실때에 새로운 생명들이 딸려 오는 것입니다.

     

    교육관에 꽃이 잘 피었습니다. 꽃이 처음에는 한두개만 피다가 어느날 활짝 피는 것처럼 예수님의 그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믿는자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될줄로 믿습니다.

    엡4:8에서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때에 사로잡힌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셨도다”

    죄와 죽음과 심판의 노예로 사탄에게 잡혀 있었던 여러분과 나를 이제는 예수의 새 생명의 능력으로 사로 잡아서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부활 앞에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한 것처럼 바로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시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이요 살리시므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실뿐 아니라 믿는 우리들은 그 예수님 때문에 새 생명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2.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36절에“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가지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것과 그리스도로 믿는것의 차이점을 알고 게십니까? 우리 말에는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만 이 말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소테르”라고 하는데 이 말은“구원자, 구세주, 생명의 은인”이라는 뜻입니다.

    두번째로 “주”라는 말은 헬라어로“퀴리오스”라는 말로“주인, 지배자, 왕”이라는 뜻으로 그 반대말은 “둘로스”즉 종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구원입니다. 새생명입니다. 십자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주로 믿을때에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따를때에는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이 얼마나 귀한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빌2:9-11에“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될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①초대교회에는 순교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주”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지배자,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황제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주”가 될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사실 이 고백 때문에 그리스도인 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때 군중들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빌라도여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했을때에 그것은 목숨을 바치는 일인 것입니다.

     

    ②유대 종교적 입장에서는“주”는 하나님입니다.

    유대종교에서 “주”는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예수님을 “주”라고 했을때에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에서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을 끝까지 좇아가서 핍박하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가운데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가는 곳곳마다 끈질기게 좇아다니며 핍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셨고 50일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 “주”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므로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십일조, 감사헌금을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주님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인되심을 너무나 약화히키고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지배자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면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재산이 없습니다. 가진 모든것, 아니 몸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종은 의지도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뿐입니다. 종은 말도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말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종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인의 허락과 결재 없이는 절대로 제멋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왜 실패했습니까?

    커다란 여리고 성은 무너뜨렸으면서 작은 아이성은 왜 무너뜨리지 못했습니까? 그 이유는 단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전쟁이 났을때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많은 적군들이 쳐들어 와서 곧 죽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도 목숨을 내어놓고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는 어쩌면 기도하다가 죽는 것이 더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런지 모릅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 보다, 출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그분에게 기도하고 의논하는 것을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그를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그는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극한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의논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자신의 출세를 보장하는 유혹의 자리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더 먼저 생각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고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가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점점 더 밑으로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주인뿐만 아니라 애굽의 주인 아니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이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요셉을 들어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때에 주님은 나를 향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 나의 주인이신줄 참으로 알고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에게 모든 일을 물어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제대로 안되면 그제서야 도와달라고 부탁이나 하는 내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의 구멍난 것이나 떼워주는 서비스 업자가 아닙니다. 주인이십니다. 욕심에 사로잡혀서 거부하지 마십시오. 아이성 싸움에서 패한 것 처럼 말입니다.

    만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것이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신줄 분명히 알고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이땅에 사는 동안 그분의 것을 빌어서 맡아 관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떠날때 내것이라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앞에서 이땅위에 사는 동안 그분의 것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할지라도, 냉수 한그릇 까지도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잊어버려도 주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는 자리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어디 놀러가는 곳에는 빠진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일에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주관하심을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한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신앙인들은 부유해서 그런지 몰라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데 우리들은 많은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만 믿고 의지합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말이 맞는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뿐만 아니라 오늘 부활하셔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고 주인되셔서 복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해서 기도도 하지 않고 도망을 갔습니다.

    능력있는 사람도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믿지 않으니까 벌벌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에 내가 한 일이 나를 살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직분이 나로 하여금 부활의 주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믿는 사람만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아프리카의 독재자의 핍박을 받고 있던 어떤 목사님이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니 총을 든 군인들이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소원이 한가지 있습니다. 죽을때 죽더라도 기도한번만 하고 죽게해 주시오”

    군인들은 목사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허락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죽어야 될때가 된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나를 죽이지만 저 사람들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하나님곁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줄로 믿습니다.”

    그 죽음의 상황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천사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이 되어 군인들이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복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살아계심을 늘 경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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