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자가 되라(요20:24-29)
  • 조회 수: 722, 2013.06.22 21:44:12
  • 좀 심각한 질문을 하나 던지면서 오늘 설교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정말 사실입니까?
    그리고, 우리 앞에도 그 부활이 정말로 있는 것입니까?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는다 하면서도 추상적이고, 아직도 무엇인가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확실한 부활 신앙이 있다고 한다면, 그까짓 장수가 뭐 그리 대단하며, 잘 산다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좀 울면 어떠하고 웃으면 어떠합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명 문제요, 생명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수고,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것만은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요, 시작이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 중 가장 긴급한 문제임을 재인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부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원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논리적이 아닙니다.

    철학적 방법으로, 논리적 변증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되어진 그대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활 사건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갔고, 베드로, 요한이 갔으며,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고 천사를 만났다. 그리고 끝까지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남아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이렇게 마치 어느 기자가 기사화한 것같이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좀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그런 흔적은 전혀 없어 그저 생생하게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좀 안다고 똑똑한 척하는 사람들은 철학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려 합니다. 가령, "진리는 망할 수 없으니 부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든지 "참된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으니 부활해야 한다"고 쓸데없는 이론을 전개하느라고 바쁩니다. 많은 철학 서적, 신학 서적들이 이런 소리들을 하느라고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런 줄 알면 됩니다.

    부활할 이유가 무엇이며, 부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억지 해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사건입니다.

    누군가가 이 부활을 설명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알 바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되든 아니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설명을 잘 한다고 없던 사건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까?

    성경은 단순하게 깨끗하게 사건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부활신앙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8일이 지난 때 예수님과 도마가 만나는 얘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전 주간에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도마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다른 제자들로부터 듣기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제자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 24-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고 하는 간절한 사랑의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에 도마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는 역사상 최대의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

    세상을 의심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회의론자로 합니다.

    회의론자의 대표적인 사람은 쇼펜하워인데 그는 이발소에 가서 면도를 못할 정도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믿고 산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사람은 믿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고 산 사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도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눈으로 보기 전에 믿었습니까? 베드로나 요한도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들이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알고 뿔뿔이 흩어졌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만 회의론자가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도 모두 회의론자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겨자씨 만한 믿음이 생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도마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불쌍한 존재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담 이후에 하나님을 배신한 인생들에게 죄가 들어와 속에서 불 신앙의 싹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을 죄의식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 신앙을 전혀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찾아오신다고 해도 자신의 불 신앙을 변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고 해서 탓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이 결여된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어두운 면만을 찾으려는 것이 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자 한 마디로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한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도마를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고 했습니다.

    디두모란 아람어인데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도마는 두 얼굴을 가지고 이렇게도 나타내고 저렇게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도마의 이런 성품은 요한복음에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

    요10:3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힐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간신히 예루살렘을 빠져 나온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변으로 피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예루살렘 바로 옆에 있는 베다니로부터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요단강가에 이틀을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요11: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요17:8)하며 예수님의 행보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6)고 합니다.

    이것은 도마가 예수님을 신뢰해서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한테 "우리를 죽이려면 유대로 가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도마는 말을 해도 이렇게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요14장을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말씀과 천국에 대한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2-4)

    그런데 바로 이어서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14:5)라고 되물었습니다.

    주님 말에 정면 도전을 하는 모습입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모든 일에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 어둔 것을 찾아서 큰 진리인양 착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도마도 주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 많은 자가 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의 포용성

    신앙과 불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반드시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저녁에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도마는 거기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

    만약에 다른 제자들이 도마는 성격이 이상하고 주님이 찾아오신 날에 없었으니까하고 돌려놓았다면 어쩌면 도마는 영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 후 두 번째 주일 즉 8일째 되는 날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26절).

     

    매사에 부정적이고 까다로운 도마, 보지 못했으니까 못 믿겠다고 한 도마를 다른 제자들은 소외시키지 않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제자들의 도마를 향한 포용성을 배워야 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셨던 사흘 동안 제 길로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도마를 다시 찾아내어 복음을 전하고 같이 가자고 청하여 주님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 간에 때때로 누구를 배척하고 배타하며 성격이 까다로우니까 끼워주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어렵게 하는 방법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의 심정을 유모와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못난 자식이라고 호적에서 떼놓겠다는 어머니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못나면 못난 대로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기도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도마가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삐뚤어진 성격이 문제였지만 그것까지도 포용했던 사도들의 넓은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신다.

    사도들이 도마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었다고 해서 도마의 마음의 바뀌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회개했다는 것은 인간적인 표현일 뿐이고 회개케 하고 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의심 많고 삐뚤어진 생각을 가졌던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케 한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못 박힌 손과 찔린 옆구리를 만지게 하시며 경험적인 지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수준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는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믿겠다고 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원초적인 단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마의 수준으로 내려가셔서 그가 원하는 방법으로 접근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불합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시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도마는 알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부터가 불합리하고 자기의 이성으로 도무지 용납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져보겠다는 말은 안 믿겠다는 말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이 도마가 생각하는 이성의 차원으로 접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성의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이성의 방법으로 접근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라고 했을 때 정작 도마는 만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결국 도마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만져보지도 않고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그의 논리나 합리적인 작용이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 자체였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오시므로 그는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의심 많던 도마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희망 없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하나님은 갈대아우르 출신인 이방인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의 조상을 삼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 갈대밭에 버림을 받았던 모세는 나중에 살인까지 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말씀을 그 손에 들려주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 또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명문가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니 역사에 가장 빛나는 왕이 되었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간음자였고 우리아를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같이 더러운 자를 쓰셨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희망 없는 자에게 희망이 생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계집종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반석이 되어 그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는 사도 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 사도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고 하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격이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신약 가운데 13권을 기록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반대하고 삐뚤게 들어서 예수님을 섭섭하게 했던 도마가 마침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였고 또한 사랑하는 사도들의 권면과 포용성 속에 일어난 위대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희망이 없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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