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자가 되라(요20:24-31)
  • 조회 수: 760, 2013.06.22 21:42:41
  • 지금은 중견 인기작가가 된 L모씨가 가난한 청년시절에 겪은 체험입니다. L씨는 그날 밤도 선배로부터 받은 번역물을 가방에 넣고 무허가 여인숙을 찾아들었습니다. 독방이 300원, 합숙이 200원이었는데 자기 주머니에 남은 것은 고작 500원 뿐이었습니다. 책상 위에 원고지를 벌여 놓고 작업을 한 두시간 했을까,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 합숙객이 신문 뭉치를 끼고 들어섰습니다.
     그는 낯선 불량소년과 하룻밤을 지새야 한다니 우울한 생각과 함께 하숙비를 치르고 남은 300원을 안전하게 숨길 것을 걱정했습니다. 소년이 손을 씻으러 방을 나선 사이 재빨리 300원을 속셔츠 주머니에 감추고 몇 권의 책을 타월로 말아서 베개 대신 베고 누우니까 다소간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옷을 벗은 후 주머니에서 돈을 쏟아 놓는데 천원을 극히 넘을 성싶었습니다. 녀석이 그 돈을 어떻게 간수할까 하고 흥미있게 지켜보는데, 소년은 정리한 돈을 웃옷 주머니에 넣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인 모를 부아가 치밀어올랐습니다.
     "이봐, 돈을 그렇게 간수해도 되는거야?" "그럼 어디에다 둬요?"
     "누가 가져가면 어떡할래?" "이 방에 나와 아저씨뿐인데 누가 있기에요?"
     "그래 이런 생활 한 지 얼마나 되지?" "고아원에서 나온 후 3년 됐어요."
     고아원을 나온 데다 이런 삶을 3년이나 했다니 어린이지만 꽤나 닳고 거칠어졌을 텐데 저렇게 순진무구하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데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녀석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얘, 얘, 나는 말이다. 네가 의심스러워서 돈 300원을 감추고 책은 이렇게 베개를 삼았단다."라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하면서 그 소년의 얼굴을 바라볼 때 지금까지 본 꽃 중에서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움 미소가 피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제가 아저씨를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에요."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소년의 자그마한 몸을 쓸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못 믿을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요, 그러다가 뒤에 후회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허상을 실상으로 보며,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소중한 것인 양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믿을 것을 못 믿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믿어야 하는 진실을 회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도 괴로울뿐더러 남까지 괴롭힙니다. 충분히 믿을만한 남편을 두고도 믿지 못하여 속을 끓이는 아내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두고도 아내를 불신하는 남편은 불행한 남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심각한 불신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은 체질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가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생후 서너달 된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세 시간마다 젖을 먹인다고 했으면 꼭 세시간마다 먹여야 합니다. 세 시간 안에는 아무리 보채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세 시간이 되었다면 어김없이 젖을 먹여야 합니다.
     생명은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지식도 지혜도 능력도 다 믿음에 근거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무능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에 떨게 됩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실이 사실되는 것은 믿을 때에만 있는 일입니다. 생명이 생명되고 진리가 진리되는 것도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불을 보듯 엄연한 사실도 내가 믿지 않으면 적어도 나에게는 사실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도 내가 믿지 않으면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에게 열심히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말을 다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생각 속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나 사상이 있어야 받아들이지, 만일 내가 전혀 새로운 사실을 말할 때에는 그것이 "소 귀에 경 읽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특히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매일 생각하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경말씀이 잘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인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 이전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백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받아들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사람 속에는 무엇인가 미리 입력되어 있는 선험적인 지식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부활 사건을 두고도 그 부활 사건이 부활 신앙으로 발전해야만 합니다. 부활 신앙에서 부활이 사건화됩니다. 부활 사건이 성립할 때에 비로소 '나'라고 하는 존재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누누히 가르치고있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앞에 놓고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엄연하게 보이시면서 굳이 '믿어 달라'고 사정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은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엄연히 보는 부활의 사건 하나를 놓고 간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 체질이 되지 말고, 믿는 체질이 되라.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부딪혀서 마침내 믿는 자가 되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도 믿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사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될 때에 지혜자가 되고, 지혜자가 될 때에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내가 그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나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부활 사건에서 믿음을 얻게 되어 이제는 모든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는 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자가 되는 기점(起點)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서 출발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고, 부활케 하신 능력을 믿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땅히 의심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생성하는 의심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론 짓는 의심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결론짓는 의심은 생산적인 의심입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 의심하는 자의 의심은 결국은 파국을 자초하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의심, 믿음을 위한 의심, 믿음으로 향하는 의심은 생명적인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끝까지 믿지 않고 있다가 결국 주님을 만나고서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마를 부를 때 꼭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부릅니다.
     사실 도마의 별명은 따로 있었습니다. 도마의 별명은 디두모였습니다.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요즘은 쌍둥이가 많지만 옛날에는 쌍둥이가 얼마나 희귀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별명이 '쌍둥이'인 것을 보면 둘이 아주 쏙 닮은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도마에게 특징적인 것은 그가 쌍둥이였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도마는 눈에 보이는 것 아니, 눈에 보인다고 하더라도 손으로 만져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기질로 인하여 '의심 많은 도마'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고, 제자들 중에서 가장 더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지난 첫 날 저녁,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 거기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서 모두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본문의 주인공인 도마입니다. 도마는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났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열 사람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데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을 보면 어디까지나 '나'라는 것이 강조됩니다. 오늘의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나', '내 손', '내 손가락'으로 확인해야 믿겠다고 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간법적인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런 의심과 망언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습니까? 그지없는 사랑입니다. 이미 도마의 의심을 다 알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를 보시자마자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도마의 어리석은 욕구를 이렇게 다 충족시켜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사랑이며 기적같은 긍휼입니까? 고집많고 못된 인간을 몸소 찾아오셔서 "보고 싶으냐? 보아라. 만지고 싶으냐? 만져라." 그리고 믿는 자가 되라고 따뜻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보인다고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만져지는 것은 다 확실하고 옳은 것입니까? 실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물론 요한일서 1장 1절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손으로 만진 바이니 더 이상 이론(異論)을 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도마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절)
     요한이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요한복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으로 보게 하여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증거하는 것이며, 이 말만 믿어도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은 지금 도마를 책망하십니다. "왜 너는 다른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도 나를 믿지 못했느냐?" 제자들이 증거한 것이나 주님이 직접 그 앞에 나타나셔서 상처를 보여 주시고 만지게 한 것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황혼녘이 되었습니다. 바닷가에 앉아서 바라보자니 해가 뉘엿뉘엿 수평선 아래로 잠겨 들어갑니다. 한 어린이가 말합니다. "저것 좀 봐, 해가 바닷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어린이가 말을 받습니다. "해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야. 지구가 돌아가는 거래." 앞의 어린이는 누에 보이는 대로 우깁니다. "아이 참 눈이 있으면 보란 말이야. 저봐. 바닷 속에 잠기고 있지 않아, 해가!" 그러나 다른 아이는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그렇지 않대두.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지구가 돌아간다구 말이야. 나는 그걸 믿어!" 여러분, 내가 꼭 눈으로 보아야 하고 내가 굳이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저 사도들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경험으로 삼을 때에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실상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도마가 다른 제자들의 증거만 듣고서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라면 그 말씀이 동일하게 도마에게 역사하셔서 도마의 영혼을 치료하며 그를 살리는 능력의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듣고만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볼 수도 없고 주님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며,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없애고 우리 안에 계속적인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앞으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지고 나서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육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 않으며, 마지막 때까지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도마처럼 강한 자기 논리를 내세우면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증거를 거부하는 자는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이미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죄 사함을 받는 이 진리를 증거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이것을 그들의 동료인 도마에게 사용했지만 그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도마의 완악함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모든 욕구를 다 채워주셨습니다. '보라', '만지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마침내 믿고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고요. 내 마음을 아시고, 내 의심을 궤뚫어보시고 내 고집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만지라고 하시는데, 굳이 손을 내밀어 만져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도마는 그제야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 가까운데서 복음을 전한데 반해,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도마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로 직행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자는 모든 믿음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낸 자들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도마가 제자들의 권면을 받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는 주님이 보내시는 것이고,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때 주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삶이 바로 시작됩니다. 여러분에게 바른 복음을 전해주는 자가 누구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전한 것이 바른 복음일 때, 그 말씀을 믿으면 바로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그는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무시하고 다른 것을 찾는다면 그는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잘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님을 본 자가 더 복이 있지, 어떻게 보지 않은 자가 더 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말씀으로 믿는 것이며, 성령께서 그 마음 안에서 깨닫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을 통하여 믿는 것이 불분명하게 생각될 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를 수십번 듣는 것보다 주님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이 더 분명한 신앙을 가지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귀로 듣고 믿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확신을 주십니다. 놀라운 영광과 기쁨도 함께 일어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믿는 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으로 이 세상을 이깁니다.
     부활 신앙이 없이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또 성령의 역사 없이 부활 신앙은 없습니다. 부활 신앙 없이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다운 생활이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확실히 믿고 이것을 믿을 때에 믿는 자가 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이웃을 믿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믿음으로써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변화하고,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되며, 죄와 사망과 사단의 유혹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그 본보기입니다. 그렇게도 비겁하던 사람이 용기의 사람, 담력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한 번의 영광스러운 체험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체험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다 소중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누누이 증거하고 있는 빛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우리를 속이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죄와 방황의 어두운 시절을 살아 왔습니까? 우리 마음에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의 거짓말에 속고, 인정에 속고, 미신과 운명론에 속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 모든 어둠을 뚫고 바른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운명론이나 거짓된 사랑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여 내 인생이 좌우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른 것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체험하는 것으로는 이런 지각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고민할 때, 처음에는 여전히 어두운 것 같지만 어느 한 순간에 찬란한 아침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무엇으로 이깁니까? 돈이나 지위로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바른 깨달음으로 이깁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깨달음은 다른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며, 나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신 말씀대로 이제는 보느니 만지느니 하는 이야기는 접어 두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제일 용기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약속을 확실히 믿는 사람, 다시 말하면 부활 신앙에 사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부활 신앙이 곧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생명이 될 때에 초월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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