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자가 되라(요 20 : 24∼29)
  • 조회 수: 477, 2013.06.22 21:43:27
  •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공포에 사로잡힌 채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근 다락방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건만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그때가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가련한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는 다락방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찾아 오셨습니다.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친히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왠 까닭인지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제자중 도마만은 그 현장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타난 도마를 향하여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이것은 그저 한 번 만나 뵈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말해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증언을 들은 도마는 25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b)

     

    주님께서 돌아가신 직접적 사인(死因)이 되었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 속에 장사되기까지 한 사람이 몇 일 지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날은 도마 역시 다행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마를 발견하신 주님께서 도마에게 다가가 하신 말씀을 본문 27절이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주님께서는 도마가 직접 보기를 원했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신의 부활'을 믿으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순간 도마는 이렇게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무엇에 대한 감탄의 고백입니까? `부활의 주님',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감격에 찬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드디어 도마도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가능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속에서 단 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를 찾는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주님의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영원한 부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제자들이 이 이후 다락방을 열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셨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에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신앙의 핵심 또한 부활이어야 합니다.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예수 믿는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지적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십시다.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7∼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므로 인하여 누구이든 단지 금생, 이 세상만을 목적하고 주님을 믿는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신앙이 아무리 출중하고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의 인생은 결국 이 세상의 땅 속에 묻혀 썩어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기에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보다 더 강하고 더 소망에 찬 삶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어찌 절망치 않을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어찌 낙심치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연고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아도 어찌 버린바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부활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다세 세워 주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심하던 도마는 부활의 주님, 주님의 부활을 본문 속에서 확인한 뒤엔 인도로 건너가, 거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증거 하다가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의 시작임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생명의 종교라 부르는 까닭은 거기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곳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단지 죽음의 종교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부활 즉 생명의 상태가 그처럼 중요하다면 왜 죽음이 필요한가 라는 것입니다. 죽음없이 생명이 계속하여 지속된다면 그것이 더 가치롭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천년전 저 머나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관련을 갖고 있음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까? 무슨 연고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단순히 그분의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허물과 죄가 함께 못 박힌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그저 그분의 사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더러운 욕망이 매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죽음을 허물어트리고 영원한 생명, 참 생명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 생명의 질이 전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영원히 죽고, 그분의 부활과 더불어 그리스도안에서 의인으로서의 우리가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분은 불멸의 신 일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우리를 위한 참된 그리스도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죽음으로 인하여 그분의 부활은 당신 개인의 부활로 끝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부활로 귀결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죽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인된 내가 죽으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로운 피조물, 영원한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만 진정으로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터득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체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체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1∼42)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생명이란 썩을 것으로, 욕된 것으로, 약한 것으로, 유한한 육체의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있기에 썩을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약한것이 강한 것으로, 유한한 육체의 것이 신령한 몸으로 새롭게, 영원히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죽음이란 결코 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허물어짐이란 절대로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죽어야 살고, 허물어져야 새로 세워짐을 아는 자들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죽고 허물어지는 것이야말로 그 생명의 가치와 질을 영원히 새롭게 하는 부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경제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소위 `1인당 소득 1만불'과 `견실한 기초'를 자랑하던 이 나라의 경제는 불과 2주일만에 거들이 나고 말았습니다. 환율은 그 짧은 기간동안 두배 가까이 폭등한 반면, 주가는 바닥까지 폭락하고 있습니다. 상호 불신에 의한 금융 시스템 마비로 인해 매일 수많은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도산하고 있습니다. 일부 품목의 가격 폭등은 사재기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급기야는 국가 자체의 부도 위기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까지 몰린 가운데 거의 모든 국민들은 좌절과 절망을 되씹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건 한 나라가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은 그 국민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요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절망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보다 오히려 더 큰 소망을 지니고 있음은, 우리는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무너져 내려야 새로이 세워지는 부활의 법칙을 확신하는 부활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후 410년 고트족의 침공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졌던 로마의 도성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허망하게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인들이 야만족으로 업수히 여기던 고트족에 의해,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대적할 민족이나 나라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의심치 않았던 로마제국이 유린당하면서 수도 로마의 도성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목격하는 로마인들은 좌절과 절망을 씹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순간에 도리어 말할 수 없는 소망에 차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도성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집필하였습니다. 인간에 의해 세워진 불의와 부패의 도성이 허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축되는 `하나님의 도성'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진정한 부활 신앙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고트족의 침략 사건 이후 로마가 모든면에 걸쳐 더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이 나라의 경제가 허물어져 내리는 이 사태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불의와 거짓 위에 세워진 사회는 사상 누각 일뿐이요, 사상 누각은 반드시 허물어지기 마련이며, 사상 누각이 허물어지는 데는 결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언제든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 속에서 주님께서 진정 허물어트리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의 사슬, 불의와 거짓의 고리가 아니겠습니까? 이 붕괴 속에서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 위에 바로 세워진 바른 사회, 하나님의 공법이 물같이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바른 나라 아니겠습니까? 이 혼란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 이상 사상누각―한순간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모래 위의 집이 아니라,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의 말씀―진리위에 결코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집을 지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손으로 행하여지는 일들이 거의 거짓과 부정직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손에 의해 작성되는 결산보고서, 회계보고서, 감사보고서, 업무보고서를 포함한 각종 보고서 중 거의 대부분이 실은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과 부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이것이 마치 정상적인 듯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살려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 1천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건만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께서 남의 손을 빌려 우리의 실상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IMF가 우리 정부와 체결한 합의문에서 10여 차례씩이나 투명성을 강조하고, 대통령에 출마한 세후보의 각서까지 오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들은 믿을 수 없는 상대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작성한 각종 서류는 신뢰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정한 선진국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의 거짓을 버리고 정직한 사회를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IMF사태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사태는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어야 살고, 허물어져 내려야 새로이 새워짐을 확실히 알고 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사상누각에 안주하던 우리로 하여금 반석 위에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집을 세우게 하시려, 주님께서 20세기말 우리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의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절망치 마십시다. 스스로 허물어 터트려야 할 부정과 거짓과 불의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 진리 위에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기에 진력하십시다. 부활을 믿고 부활을 실천하는 우리 자신들로 인해, 머지않아 이 나라는 반석 위의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대강절 세 번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의 입은 정의를 말했지만, 우리의 손은 불의와 부패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혀는 진리를 외치고 있었지만, 우리의 말은 거짓과 욕망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우리나라는 사상누각에 불과했으며, 사상누각은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상누각이 무너져 내리는 데에는 결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음을, 우리의 살아 있는 동안에 확인시켜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죽어야 살고, 무너져 내려야 바로 세워진다는 부활의 법칙을 일깨워 주셔서 더 더욱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20세기 말 우리에게 베푸신 이 마지막 은총의 기회에, 우리의 손으로 모든 거짓과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철저하게 허무는 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진리 위에서 우리를 진실되고 정직하게 바로 세우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부활의 삶을 살며, 부활의 법칙을 실천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이 나라의 21세기가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부활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이 귀한 은총의 기회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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