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고전 15:1~11)
  • 조회 수: 841, 2013.07.10 07:27:32
  •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에서 이 부활의 내용은 십자가와 함께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간 저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활에 대해 말씀드리고, 그 부활의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이 현실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부활이다.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십자가의 참 뜻을 몰랐을 것이다. 부활이 없었더라면, 십자가는 한 사람의 착한 어른이 비극적 죽음을 마친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그 소문은 몇 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소문은 쉬 사라져 버렸을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일은 부활이다." 
     
      로흐만 교수는,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믿음이 정초 된다." 고 했습니다. 저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 부활 의식, 개념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나중에 살아나서 부활에 대한 케루그마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먼저 부활이 역사적 사건으로 있었고, 믿음이 그 사건에 기초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사도 신경에서 "장사된 지 사흘만에"를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된 후 사흘이라는 시간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좀더 나아가서 역사적으로 매우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사도신경의 내용과 복음서의 내용이 일치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고 나서 사흘이라는 시간은 매우 절망적이며 어두운 밤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깊은 절망감에서 그들의 앞날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고향 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을 잘 보존하기 위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가면서 누가 그들을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 것인가를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흘만에 그러한 어두운 밤이 새로운 역사의 아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놀라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몇몇 목격자들의 놀라움과 기쁨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있은 후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후 부활의 신앙에 기초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날이 생겨났습니다. 주중의 첫 번째 날인 일요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주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오심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사건에 대한 기사 배열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의 부활 그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견해를 달리 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예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합니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의 빈 무덤을 강조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후 분명히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밀봉까지 하고 로마 병사들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누가의 경우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를 강조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던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과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문을 모두 닫아 걸었는데 그 자리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증시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그 다음으로 부활의 의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 이전의 삶의 관계들의 회복, 죽은 시신의 환생, 부활 이전 것의 연장이 아닙니다." 부활은 마지막 것들의 드러남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것들이란 죽음 이후의 인간의 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종적인 것들은 인류의 운명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 세계의 운명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하나님의 그 미래의 시간들 가운데 감취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잠시 저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저의 신앙의 패러다임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이패러다임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차례 신앙의 재구성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에서 성장하면서 형성된 저의 하나님과 인간 이해는 여러 차례 새롭게 재 구성되는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는 방황, 좌절, 아픔, 당황이 수반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의 영혼의 닻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망의 약속에서 저의 개인적인 삶의 통합, 통합적인 목회 비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망의 약속은 저의 개인의 경건, 개인적인 업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기 때문에 더 이상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망의 약속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 동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을 예수의 부활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의 시간 안에 있는 저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 가운데 있는 저의 모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전히 용서되고, 받아들여지고, 화해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 약속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시험에 들거나, 혹시 좌초해서 넘어질 때 저는  깊이 좌절하거나, 깊은 심연의 골짜기로 떨어져 저를 억압하거나, 학대해서 만신창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나는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희망과 확신 가운데서 넉넉히 다시 일어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 세상을 에덴동산에 비추어 보지 않고 하나님의 그 완성의 시간 안에서 보게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의 시간들에 대한 시작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새로운 시간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은 일반적인 것,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것, 하나님의 전적인 새로운 세계에서 가능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비춰진 인류의 미래는 심판과 저주가 아닙니다. 평강과 희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지평 위에서 무엇이 거짓이며, 참인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진정한 희망과 환상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모든 어두움의 실체를 그대로 다 폭로합니다. 우리는 죽음이 생의 마지막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습니다. 사탄은 죽음을 앞세워 우리를 협박하군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로 그것이 얼마나 거짓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희망과 비전은 교회 자체의 크기나 재정적 풍부나, 교인들의 지적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희망과 미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에 있는 그 미래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향해 가는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이 우리의 현실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죽음이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의 부활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 가운데 있는 자녀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활을 통해서 받아드리게 됩니다. 부활이 과거의 삶의 연장이 아니고 새로운 미래의 시간이라는데서 우리는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드리지 않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에드워드 보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이 너무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의 고향은 조그마한 섬이었습니다. 
      섬을 떠날 때 할아버지는 어린 에드워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한테 꼭 일러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이제부터 어디를 가든지 너로 말미암아 네가 있는 곳이 어떤 모양으로라도 보다 나아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너에게 주는 유일한 밑천이다. 너는 이것을 명심해서 실천하며 살아라.' 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면서 어린 손자를 보내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미국 본토에 상륙한 에드워드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신문팔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 한 모퉁이에서 신문을 팔면서, 
      '나는 지금 보스턴이라는 도시 길모퉁이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이 길가를 무슨 모양이라도 보다 나아지게 해야겠다.'하고 에드워드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문을 파는 틈틈이 모퉁이에 뒹구는 종이 조각과 담배 꽁초를 집어 치우기도 하고 조그만 빗자루를 마련해서 때때로 쓸기도 했습니다. 손님들은 그 곳에만 오면 틀림없이 신문을 살수 있다는 기쁨과 길거리가 한결 깨끗해진데 대해 에드워드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는 그 뒤 몇몇 다른 직장을 거쳐서 커트스 출판사의 사무실과 서적 판매장을 청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오기 전보다 여기가 좀더 깨끗해져야 한다. 서적과 잡지도 좀더 많이 팔려야 한다."는 다짐과 함께 할아버지의 교훈을 생각하군했습니다.
      그가 온 뒤 그 회사는 티 하나 없이 깨끗해졌고 판매원들의 일까지 도와주었기 때문에 판매활동도 한결 원활해졌습니다. 그는 그 회사에서 점원이 되고 판매부장이 되고, 경제부장, 편집국장 지배인 등의 직위를 거쳐 중역이 되고 사장으로까지 성장하였습니다.

      에드워드는 '나는 지금 미국의 유력한 시민이며 경험도 경제력도 가졌으며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출판물도 갖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을 보다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할아버지가 준 인생 철학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국내에서 여러 사회운동과 문화사업을 벌렸고, 각종 출판물을 값싸게 농촌까지 보급시키는 정열을 불태우다가 1925년 은퇴했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어디를 가든지 너로 말미암아 네가 있는 곳이 어떤 모양으로라도 보다 나아지도록 힘써야한다."
      저는 에드워드의 할아버지의 교훈과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간 에드워드의 삶에서 부활의 빛을 보게 됩니다.

      어두움 가운데 부활의 빛이 침투할 때 현재보다 더 나은 세상을 보게 됩니다. 더 소망스러운 미래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소망의 삶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 불의, 독재, 거짓, 폭력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현재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입니다.

      본훼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기적은 죽음의 우상화를 근본적으로 폐기시킨다. 죽음이 최종적인 말을 하는 곳에서는 지상적인 것이 모두 무(無)로 된다. 지상적인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생을 가볍게 취급하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에 대한 냉담한, 경멸 적인, 발작적인 긍정이다. 새 인간, 향상되어져야 할 새로운 세계, 새 사회가 말해지지만, 그 새것이 생과의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못할 때, 죽음의 우상화는 다시 현저히 나타난다. 죽음의 힘은 이미 꺽여졌다. 부활과 새로운 삶의 빛이 죽음의 세계 위로 비치는 것이 인식되는 곳에서는, 삶으로부터 영원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삶으로부터 전부를 받아드리느냐, 전부를 거절하느냐가 아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선택하고, 기쁨과 슬픔을 받아들인다."
      
      라기츠(Leonhard Ragaz)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건이든, 인간이든, 개인이든, 국민이든 간에, 짓밟혀 으스러진 모든 것의, 죽여진 모든 것의 부활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열려진 무덤을 통하여 끝없는 부활과 삶의 빛이 세계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것이 부활이고 부활 신앙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존재로 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한숨, 탄식 대신에 부활의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프랜시스 쉐이퍼(Francis Schaeffer)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과제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부활의 삶을 살아내느냐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얻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부여받은 새 생명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새 생명이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받은 자녀들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 헌신, 섬김이 구원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러한 삶은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시 환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가운데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그 부활을 통해서 진정한 새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새 것에 대한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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