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씨를 갖고 있느냐?(고전15:12-20)
  • 조회 수: 419, 2013.07.10 07:41:33
  • 부활주일이 되면 주일학교에서는 삶은 계란을 선물로 많이 주고 있습니다. 저도 상모교회와서 부할주일 아침 계란을 주면서 가끔가다가 글이 써있는 계란이 나오면 한계 더주고 좋은 글이 나오면 두 개 주고 했습니다.
    주는 이유는 계란에서 부화되어 병아리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도 육신에서 부활한다는 모습을 아르켜 주는 내용입니다.
    제가 어릴 때 학교 다녀오면 닭 모이 주는 것이 집에서 공부하는 첫 번째 과목입니다. 
    어느날 우리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다. 어머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마리밖에 없는 장닭을 잡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다음에는 계란을 암닭에게 품게 했더니 병아리가 안되었습니다. 두 번 세 번 안되었다. 누가 말하기를 수닭이 없이 놓은 알은 부화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왜냐 정자가 없다는 것이다. 무정란 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수닭을 한 마리 사다 놓으니 그 다음부터 놓은 알에는 병아리가 되어 나왔습니다.

    요사히 양계장에서 나오는 계란은 모두 무정란이다.이는 수컷이 없이 놓은 알에는 정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오래동안 품고 잇고 잘 보관해도 병아리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는 분간 할수 없다.그러나 부화할 수있는 조건을 주어보면 압니다. 속에 정자가 있으면 부화하고 무정란이면 부화도 못하고 오래되면 썩고 만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정자 때문입니다.

    어미가 품기 시작해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수컷의 생명이 있는 유정란은 햇빛에 비추어보면 부화하기 전에도 생명이 시작되어 기관들이 형성되는 핏줄기가 뻗쳐나다가, 만기가 되면 부화하여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무정란은 아무리 품어도 그 어떤 변화도, 생명의 탄생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품으면 품을수록 곯고 부패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 여러분도 생명의 부활을 소원 하시는가?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가? 소원하고 원하시는 성도는 아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다 같이 살아있습니다. 지금의 겉모습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확연히 우리 안에 생명이 있고, 없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무정란입니다. 지금은 다 같이 살아있지만, 그러나 주님 오시는 날 그들은 죽음의 선을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것은 신앙인 중에도 무정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두개인처럼 드러내 놓고 부활의 신앙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부활을 이야기하고, 머리로는 부활을 아는 듯 한데,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은 도저히 부활을 알고 믿는 삶의 모습이 아닌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여러분, 부활을 알고 말하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속에 부활의 씨가 있느냐 아니면 겉으로 보기는 꼭 같은데 부활의 씨가 없느냐' 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14일 동안의 새벽 특별 집회를 마치고 맞이한 부활의 아침에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진지하게 물으십니다. "너희 안에 부활의 씨가 있습니까?"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교사 여러분 씨가 있습니까? 
    구역 공과를 들고 계시는 구역장님들 있는가?
    투표하여 당선된 인기있는 자치기간의 회장님들이여 있습니까?
    취임받은 권사님들 안수받은 집사님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이 강단에서 성도를 대표하여 기도하시는 장로님들은 있습니까?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썩여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 없는 무정란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말씀에 내 신앙을 비추어봄으로서 내 안에 부활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내 삶 속에서 주님을 자랑하는 힘이 없으면 부활의 씨가 없는 무정란 신앙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의 고백처럼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주님을 전파하는 것도 힘이 없고,또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전도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힘있고 담대하게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힘있고 능력 있는 전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확고한 부활신앙이 나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전도의 열정이 있다면 부활이 있는 신앙이며 없다면 부활의 씨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전도의 열정이 없다면, 주님의 심각하신 물음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믿는다고 얼마나 고백 했느냐. 아직도 부활의 씨가 없는냐?"

    둘째, 내 삶 속에서 믿음이 역사하는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면 부활의 씨가 없는 무정란 신앙입니다.
    14절에서 부활이 없으면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인데 소용없는 믿음이라는 뜻이요, 빈 껍데기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이겨도 넉넉히 이깁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능력이 빠져버린 무력한 믿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찬송을 하면 주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에 내 마음의 모든 근심이 사라집니까? 말씀을 들으며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모습이 있습니까? 이런 요소들이 있어야 부활의 생명이 있는 신앙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를 해도 역사가 없고, 찬송을 해도 평안이 없으며,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안에 부활의 믿음이 있는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 오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산 자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이 없는 믿음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으로부터 믿음은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믿습니다'를 수백번 외치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 능력은, 부활의 주님을 믿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을 나의 것으로 확신할 때에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은 죽음을 이긴 결과입니다. 죽음을 이겼다면 이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안절부절을 못합니다. 조금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마음엔 평안을 잃어버리고, 얼굴엔 웃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의 신앙이 그렇게 연약하면 되겠습니까? 예전의 믿음의 선조들은 순전히 주님을 위한 고난에 목숨을 걸었었습니다. 예수 믿으려면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믿기 위해 직장을 버리고, 예수 전하기 위해 자기의 전부를 쏟아 붓고, 예수를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고 살다가 생명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엔 예수 그리스도의 미소가 온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를 위한 고난도 아닌, 나 먹고살자고 하던 일이 좀 안된다고 낙심합니다. 세상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신앙에까지 영향이 있어 비틀거립니다. 사람이 실망시켰다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모든 의욕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런 모습 어디에 죽음을 이긴 부활의 신앙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4세기 중엽에 안디옥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있었던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듣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고 또 변화를 주는 힘이 있었기에, 그가 설교할 때면 예배당은 언제나 초만원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그대로 적용시키며 할 말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일반 대중들로부터 존경이 높아감에 따라 많은 사람의 미움도 함께 받아갔는데, 그에 대한 존경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황제에 대한 존경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후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은으로 자신의 조각을 새겨 신처럼 숭배하는 이교예식을 진행하도록 했는데, 크리소스톰이 이 사실을 꼬집어 설교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크리소스톰의 설교의 요지가 이러했답니다. 
    [헤로디아는 오늘날 다시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헤로디아는 오늘날 또 다시 요한의 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크리소스톰은 체포되어 유형길에 오릅니다. 기후가 나쁜 흑해지방의 여름 태양 아래에서 그는 열병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호송원들은 그를 채찍으로 때려가며 걷게 했고, 몸은 햇빛에 그을려 갈라 터졌습니다.

    자신이 이사야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크리소스톰은 자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만약 황후가 나를 유형에 처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라. 그래도 이 땅은 주의 것이다. 내 몸을 갈기갈기 찢기 원한다면 나는 이사야를 생각하리라. 나를 바다에 던진다면 나는 요나를 생각하리라. 만약 불에 던지운다면 그처럼 불에 던지어졌던 사드락.메삭 아벳느고.세 사람을 생각하리라. 나를 맹수에게 준다면 사자굴의 다니엘을 기억하리라. 돌로 쳐죽인다면 내 앞에는 첫 순교자 스데반이 있다. 그녀가 만약 내 목을 요구한다면 내 앞에 세례요한이 빛나고 있다. 적신으로 모태에서 나왔은즉 적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이렇게 하늘만을 바라보며, 죽음을 이기는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 앞에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조금만 괴로워도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주를 위한 고난도 아닌 나 잘먹고 잘살자고 하던 일이 좀 안된다고 낙심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신앙에까지 영향을 받고, 사람이 실망시켰다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다면, 우린 정말 부끄러운 신앙인 일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은 죽음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죽음을 이긴 신앙은 모든 것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부활에서 이어지는 천국본향이 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이 땅에 집착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신앙은 어디서든 정의로울 수 있으며, 어느 상황에서도 담대하고, 무슨 일을 만나도 소망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이 세상으로부터 초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을 가졌다하면서 씨가 없는 무정란을 품는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부활이 빠진 무정란 신앙은 무능력합니다. 아무리 품어도 거기서는 생명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도 불쌍하다고 사도바울이 말씀한 것입니다. 
    이 부활주일 아침에 {네 마음속에 부활의 씨를 품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물음에 확실한 답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품고 있는 부활의 신앙인이 되십시오. 부활을 사실 그대로 믿으라는 얘깁니다. 나도 똑 같은 부활을 경험할 수 있음을 확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활의 씨를 가슴에 품고 새롭게 믿음으로 시작 하십시오. 죽음이 물러가고 기적이 찾아오는 체험을 경험 하실 것입니다. 나는 믿었다.나는 보았다.나는 체험했다는 승리의 고백을 선포할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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