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고전 15:12~19)
  • 조회 수: 733, 2013.07.10 07:45:04
  • 할렐루야!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죄악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장사한지 삼일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을 맞이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날이 있었기에 우리의 믿음도 빛을 발할 수 있었으며 이 날이 있었기에 우리의 고난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죽음도 우리의 소망을 꺾을 수 없었으며 예수의 부활이 있었기에 2,0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활의 복된 소식이 온 누리에 전파되고 있으며 이 소식을 듣는 자마다 죽었던 심령들이 다시 살아나는 새 생명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좋은 날, 이 기쁜 날에도 우주의 모든 만물이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한다고 하여, 그 누가 믿지 않는다고 하여, 그 어떤 세력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요 우리들의 믿음의 뿌리요 증거하여야 할 제목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루는 인도에서 스탬리 죤스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도중에 한 이슬람 사람이 나서서 "우리는 당신들이 못 가진 것을 가지고 있소.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멧의 시체가 담겨 있는 관이 있고 또 무덤이 있소, 정말 마호멧이라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 가보시지요. 빈 무덤밖에 없지 않소." 그때 스탬리 죤스 박사는 "고맙습니다. 당신의 말이 진실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빈 무덤밖에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학설을 발표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존재하며 그 사실에 기초하여 주전(A.D)과 주후(B.C)로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도 분명 주전의 삶과 주후의 삶이 달라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전제를 염두에 두고 부활절 메시지를 증거하면서 부활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I.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행복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 오늘은 한번 솔직히 생각하여 보십시다. 매년마다 부활절을 지키고 그때마다 헌금도 드리고 축하 찬양도 드리고 부활절 메시지도 듣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에 대한 이론을 말하고 듣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쉽게 생각하여 보십시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장사한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왜 축하의 내용입니까?

    원리는 간단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나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들도 부활할 수 있기에 축하의 내용이며 감사의 제목이며 기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기에 이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설교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입각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죽은 자들이 제일 불쌍한 자들입니다. 인간의 모든 슬픔과 눈물, 허무와 절망은 죽음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있어도 죽음으로 향하기 때문에 불쌍한 자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죽음으로 향하기 때문에 불쌍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도들에게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천하에 어리석은 자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헛수고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합니다"하고 자신만만하게 외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설령 가난해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병들어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멸시천대를 받아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는 자가 불쌍한 자요 부활의 소망이 없는 자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33:29).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편 16:3).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이기 때문에 행복하며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기 때문에 행복하며 더더욱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기에 행복합니다. 우리 인생들의 최고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마디로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닙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 다시 사는 것이요 다시 사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지 삼일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II.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의 행복은 무덤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는 삶의 주인이 바뀌어 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이전의 삶 즉 주전의 삶은 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 주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들은 죽은 자들과 가는 길이 다릅니다. 먹는 양식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6:27)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산 자의 양식과 죽은 자의 양식은 다릅니다. 죽은 자의 양식은 썩을 양식이요 산 자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이 다르고 먹는 양식이 다른데 어떻게 시시한 것에 얽매여 산다는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이전에 세상적으로 자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귀한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까? 아까워서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어렵게 말할 필요가 없이 자기가 더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 가치관 아닙니까? 세상의 좋아하는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을 때에는 그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사망권세 밖으로 무덤 밖으로 살아 나온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덤 속에 머물러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경도 잘 압니다. 예수님도 잘 압니다. 죄가 나쁜지도 압니다. 은혜를 체험한 적도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덤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직 자기의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키는 부활의 체험이 없습니다. 아직 자기의 취미를 놀랍게 바꾸어 버리는 부활의 체험이 없습니다. 아직 자기의 습관을 온통 새롭게 바꿔주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나와 있어도, 직분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여전히 옛날 좋아하던 것 그대로 좋아하고 옛날 의지하던 것을 그대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자들과 똑같은 것 떄문에 웃고 똑같은 것 때문에 울고 똑같은 것 때문에 조바심하고 똑같은 것 때문에 자랑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늘 설교 듣는 반응과 태도가 뜻뜻 미지근하고 사모하는 눈빛 한번 아멘 한번 없던 어떤 여집사님이 갑자기 설교 시간에 눈을 반짝이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듯 목사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열심히 적고 다시 쳐다보고 열심히 적고---- 목사의 가슴이 뛰었습니다. 드디어 저 집사님의 가슴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었나보다. 예배가 마치고 다른 여 집사가 그 집사에게 갔다. 감동한 눈빛으로 물었다. "집사님 오늘 은혜를 충만히 받았나봐요" "예?,아예 오늘 종이에 적은 거요? 지금 곗돈 붇고 있는데 그것 받을 날 계산하고 있었어요!" 볼링을 열심히 배우고 볼링에 정신이 팔린 어느 목사님이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마지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까지는 좋았는데 아멘 한다는 것이 그만이야 "스트라이크"하고 큰 소리를 치더라나요. 누가 지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밤낮 세상의 것에만 도취하다보면 무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무덤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게 됩니다. 무덤 속에 죽어 있던 시체가 이제 부활하였으면 무덤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어둡고 더럽고 냄새 나는 그 곳에서 더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무덤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무덤 속에 두고 갈 것들을 위하여 일주일 내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아둥바둥 하루 일주일 일년 내내 그런 것들만 좇아다니느라고 피곤하고 바빠서 새벽기도 한번 금식기도한번, 교회에서 봉사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제 무덤 밖으로 나왔으니 무덤가에서 맴돌지 말고 사명의 길로 생명의 길로 뛰어 나가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믿음 소망 사랑이 무덤 속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부활주일 예배가 헛 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봉사도 기도도 인내도 다 헛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신 부활의 능력이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과 육체를 새롭게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말씀그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쳐지는 도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저는 설교의 제목을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라고 정하여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설교제목에서 무엇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으니 그에게 붙어있는 나의 심령도 부활하고 나아가 내가 모인 우리들의 심령도 부활의 은총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아직도 물질의 무덤 속에서 갇혀서 신앙의 활력을 얻지 못하는 심령들은 물질의 무덤 속에서 부활하는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세상의 것에 얽매여 세상의 무덤 속에 갇혀서 냉냉한 신앙생활을 하는 심령들은 세상의 무덤 속에서 뛰쳐나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죄의 무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심령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죄의 무덤 속에서 해방되는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부디 바라기는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로 이어지는 능력이 대성교회와 나아가 온 누리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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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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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 설교자료 - 예수 부활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고전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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