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의 십자가(눅 23:33-43)[고난주간] [고난주간]
  • 2021.12.22 11:21:52


  • 어느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귀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아들로, 그 아들은 어머니의 전부였습니다. 아들의 장래에 대해서도 꽤 큰 희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아들이 뜻밖에 꿈에도 상상 못할 큰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죄의 결과로 제일 먼저 상처를 입게 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물론 어머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는 그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인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을 극진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언제나 남편을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남편은 큰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때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을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그의 아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남자를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될 때에 제일 상처를 크게 입는 이는 그를 제일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에게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습니다. 이 상처와 고통은 사랑에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상처는 깊고, 사랑이 뜨거울수록 그 고통은 더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불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무한히, 영원히, 불변하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를 하고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중심에 큰 상처를 입혀드렸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가슴 속에 고통의 십자가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의 가슴 속에 세워진 고통의 십자가의 역사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의 사랑과 성품과 그의 교훈과 생활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의 생활의 절정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깊이 상한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그를 놓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  대신 폭동과 살인 혐의로 붙들려 있는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바보다 더 중한 죄인으로 본 것입니다. 폭동과 살인을 한 죄인보다 더 중한 죄인으로 취급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두 강도와 함께 달리셨습니다. 두 강도의 십자가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강도와 동류로 취급되어 그들과 똑같은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1] 죄짊을 진 십자가

    왜 예수님은 하필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을까? 그것은 그의 십자가에서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온 인류의 죄가 처형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저주받은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처리하는 저주받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불태우는 쓰레기장과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은 인류의 모든 죄를 함께 끌어안고 그 죄값을 치르는 가장 저주받은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예)이사셀 양(레16:6-22)
     구약시대에 죄를 속하는 속죄제도 가운데 "아세셀 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년 1년에 한 차례씩 7월 10일에 드리는 속죄일의 제사는 올릴 때 쓰는 염소입니다. 이 때가 되면 두 염소를 취하여 제비를 뽑되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를 뽑되,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산 염소에게는 아론 제사장이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하여 그 염소를 무인지경 광야에 내놓는것입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지고 죽는 것입니다. 아세셀이라는 말은 [내어놓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아사셀은 바로 세상 죄를 짊어 지시고 골고다로 걸어가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지만 하나님은 끝내 거기에 응답하시지 아니하시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도 거기에 응답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자가 되어 벌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들 사이에 끼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실상은 그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그 죄는 참으로 무거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감상적인 눈으로 보면서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소멸되어 가는 인간의 죄를 직시하면서 떨림과 두려움으로 그것들을 저주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불타고 있는 죄악의 냄새에 치를 떨어야 할 것입니다.
     예) 장안동 뚝방길로 가다가 보면 분뇨 처리장 옆을 지나게 됩니다. 그 냄세 때문에 코를 막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것들이 다 내 속에서 나온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참혹한 십자가가 벌주고 있는 죄악에  대해 눈을 돌려야 하며 동시에 그것들이 다 내게서  나온 것들임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강도들 사이에 서 있는 예수의 십자가는 날카롭게 내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 죄가 얼마나 무섭고 중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한번도 전율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감사한 것으로 받아 드리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자각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너무 이 죄에 대한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가르치고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뿌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그리스도 앞에 고백하며 거기서  자유함을 얻는 과정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항상 구원받지 못한 사람같이 개운함이 없으며, 구원받은 자로서의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것인지 안  받은 것인지 잘 알지 못해서 항상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고 있어서 신앙에 발전이 없으며,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항상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처리되고 있는 내 죄를 바라봅시다. 내 죄를 깊이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기쁨에 넘친 삶을 창조하며 능력 있는 삶을 이룩해 가시기 바랍니다.

     [2] 큰 구원의 십자가

     다음으로, 하필이면 강도들의 십자가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 십자가에 처형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죄인인 강도라도 구원할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조롱하기를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으 택하신 자 그리스도 여든 자기도 구원할 지어다 하고"(35절)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물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또 예수를 못박은 군인들도 그를 희롱하면서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36-37절). 또 옆에 같이 달린 강도 한 사람도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39절)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다같이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뜻했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생각한대로 그리스도 됨이 그런 작은 능력을 나타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셨고 나병환자도 고치셨으며 앉은뱅이도 일으키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가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구원한다 해도 저들이 믿지 아니할 것을 아셨다. 그리스도 됨은 바로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구원을 포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로만 생각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능력의 근원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이런 사람들의 요구와 달리 다른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에게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그는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은 바라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죽음은 자기의 죄값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거기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구원을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강도가 어떻게 이런 신앙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그 강도는 비록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자기와 같이 고통을 당하고 계시지만, 그는 그리스도요 그의 나라를 이룰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그 그리스도에게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3절).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이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옛날 그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무리들처럼 당장 지금 이 땅에서 구원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장 내 병이 치유함을 받기를 바라고, 당장 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당장 내 사업이 잘되기를 기대하며, 당장 내 가정이 잘되기를 기도하며, 당장 이 땅에 통일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차라리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 죄에 대한 대가로 이런 정도의 고통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 민족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로 오늘 이 민족이 분단되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아직도 우리가 온전히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진통을 겪는 것도 우리 속에 진정으로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없고, 여전히 이기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어리석은 이기주의를 들어주려고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자들을 위하여 서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를 이루어 주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록 강도 같은 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원한 삶을 약속하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약속을 이루기 때문에 큰 능력입니다. 강도같이 완악한 자라도 즉각적으로 그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되게 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빛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속에 분명하게 세워진다면 우리가 비록 고달픈 삶을 산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병들어 육체가 산산 조각 나는 것처럼  아프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능력을 진정으로 깨달아 안다면 우리는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하는 능력은 행사하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남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시므로 하나님 우편에 복귀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땅에서 영광과  부귀를 얻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영화의 어떤 마지막처럼 골고다 산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어떤 극적인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한 채 예수님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바로 그렇게 서 있으므로 해서 승리가 되었고, 구원의 놀라운 능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강도들과 함께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 십자가는 내 죄가 강도와 같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 십자가에 죽어야 했을 죄인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예) 언젠가 야외에 나갔다가 큰 돌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돌을 들어 다른 한적한 곳으로 옮겨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제가 치운 돌 밑에 살던 개미들이 서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개미들을 해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개미들에게 상당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을 개미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을 개미들에게 전해지게 하려면 직접 개미가 되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이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와 같이 십자가를 지심은 바로 나같은 죄인이 되어 나를 대신 하셨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대신 하시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아래서 내 죄를 인식하지 못할 때, 참된 구원의 기쁨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 자신의 처절한 죽음만을 상징하기 위하여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한 승리의 표지로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고난일에 감상적인 눈물 대신에 오히려 경건한 찬송으로 그리스도의 놀라운 승리를 찬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철저하게 자기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드립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

분류  제목  등록일 
고난주간 2021.12.22
고난주간 2021.12.22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11.05
고난주간 2013.11.01
고난주간 2013.10.30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09.0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