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 예수와 사람들(눅 23:44-56) [고난주간]
  • 2013.09.02 09:07:09
  •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였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려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50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데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더니 52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우리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시각이 당시 유대인의 시간으로 마가복음 15장 25절에 보면 제 3시라 기록이 되어 있고, 그후 운명하신 시각이 제 6시라고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현행시간으로 따져서 그 현지 시간을 살펴본다면, 오전 9시에 못 박히시고 무려 3시간 동안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후에 낮 12시 곧 한낮 정오에 운명하신 것으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그 시각 곧 낮 12시 정오, 즉 유대인의 시간으로 오후 3시 되던 12시 정오부터 오후 3시 되던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 9시 그 3시간 동안이나 큰 변이 일어났습니다. 대낮 12시부터 멀쩡하던 맑은 그런 환경 속의 태양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태양이 빛을 잃고 마치 달같이 되어 가지고서 세시간 동안이나 그러한 사항이 계속되었고, 성소 안에 굳게 내리워져 있던 휘장이 일반 사람은 손을 대기만 하면 즉사하게 되던 그 휘장이 사람들의 손에 의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그 시각 그 순간에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푹 찢어져 나뉘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52절 이하를 살펴보면, 바로 그때 그 시각에 예수를 따르다가 먼저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가 있던 성도들이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그 시각, 성전휘장이 둘로 나뉘어지는 그 순간, 태양이 빛을 잃고 계속 타고 있는 그 시간에 많은 수의 무덤들이 열리고 그 죽었던 성도들이 살아나서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상식에 의하면 성도들은 살아나자마자 무덤 밖으로 나와야 하겠으나 밖으로 나오지 않고 3일 후 예수님이 부활하여 예수님이 나오실 때 따라나온 그런 일이 있었으니 무덤들이 열려 그 안에 죽었던 사람들이 아주 영화로운 빛으로 되살아난 이런 사건이 바로 그때 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그 시각에 되어진 일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이변이 그들 주변에 즉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낮 12시를 기해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므로서 당시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그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참으로 의인이였도다'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참으로 그가 말하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큰 사건이 이 땅에 물리적으로 자연적으로 일어나게 됨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닌 줄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예수님을 둘러쌌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각기 이 형편을 보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 곁을 떠나갑니다. 그 된 일을 보고 오늘 이 본문에는 "그 된 일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고 떠나갑니다" 48절에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또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49절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멀리 서서 그 되는 일들을 보고만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그 되는 일을 보자마자 당장 빌라도에게 나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로부터 내려서 세마포로 감고, 그리고 준비한 향품을 발라서 정중히 장사를 지내주는 이런 무리로 나누어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과연 이들은 각각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이었는가? 예수님 살아 계실 적에 어떻게 했던 사람들인지를 살펴드릴까 합니다. 가슴을 치고 돌아갔던 그 무리들은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죽이소서!" 하면서 예수님을 죽도록 내어 몰았던 사람들이요. 그리고 허락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직접 가담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의 죽으실 때 되어지는 이 엄청난 사건을 보고 가슴을 치면서 그 현장을 피해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종류의 사람 "멀찍이 있어서 그 되는 일을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다."라고 소개된 사람들은 우리가 예측한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되어지는 모든 일을 멀찍이 서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거의 3년 동안 따라다닌 저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서 평소에는 예수님과 참 가까웠으나 이 마지막 순간 되어지는 일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종류의 사람, 당시 대단한 사람 총독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나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내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네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고 내려온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마포에 싸서, 그리고 향품을 발라서 정중히 자기들이 예비해놓았던, 아직도 사람을 장사한 적이 없는 그런 돌무덤에 장사를 지내주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였느냐? 아리마데에 사는 요셉이라는 사람이요. 또 요한복음 19장 38절 이하에 소개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일어났던 그 엄청난 사건을 본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되돌아간 것도 이해가 갑니다. 또 두 번째 종류의 사람, 멀찍이 쳐다보고 있었던 제자와 거의 3년 동안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쩌면 매우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해서 이제 장사를 지내준 이 니고데모와 그리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을 보면서 여러분은 이 세 종류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에 유익했겠는지, 과연 하나님께서 누구를 가장 기뻐했겠는지? 여러분들의 생각이 어떠하십니까? 우리들의 생각에 아무래도 니고데모와 그리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이 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위하고 장사까지 지내어주었으니 가장 하나님 나라에 유익했고 그리고 쓸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러 날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께서 3일 전에 이처럼 목숨을 걸고 열심히 충성했던 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사람 요셉을 부활하여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 여전히 이 땅에 한 40일 계시다가 하늘로 올리워 가셨는데, 한 40일 동안에 계시는 동안에 이 세상에 계시면서 10차례 가까이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만 제자들, 갈릴리로부터 온 여인들, 이런 여인들을 만나주었을 뿐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마지막 예수님의 그때 그 형편에 목숨을 걸고 나섰던 니고데모와 혹은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들은 혹시 멸망 받은 것 아닌가 이런 염려도 가져 보실 수가 있겠느냐 그럴리는 없겠지요. 오늘 본문 잠시 앞에 6절부터 나옵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가실 때 잠시 잠깐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를 대신 져 주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잠시 주님의 일을 도와주기만 했던 그것도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잠깐 져 주었던 그 사람의 경우도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그로 인하여 그의 후손들과 그의 어머니도 큰 보호를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바로 본문 직전 43절에 나타나 있는, 함께 달려 죽게되었던 두 강도중에 한 사람 그 사람은 큰 죄를 지었고 마지막 예수님과 함께 운명하기 전에 그는 주님을 지지합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옆에 있는 강도에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고 잠시 부탁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으니, 이런 강도도 주님 만나서 위로를 받는데 구레네 시몬도 그와 그 후손이 잠깐 주님에게 도움 드린 일로 인해서 큰복을 받았거늘, 하물며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그리고 니고데모의 목숨을 걸었던 그 충성이 어찌 위로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멀찍이 서 있었던, 제자들에게는 여러차례 나타나 만나주셨지만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사람 요셉을 만나주신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아니하니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본문 50절-51절을 기초로 해서 한 번 살펴본다면 이 3종류의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50절에 보니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데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더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눅23:50-52)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3종류의 사람들은 그때 예수님의 그 죽으시는 일을 두고 각각 표현이 달랐습니다. 마음가짐이 달랐습니다. 가슴을 치고 되돌아갔던 사람들 후회하고 슬퍼하며 돌아갔던 이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느냐? 예수를 죽이는 것이 가하다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죽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 가서도 대제사장 앞에 가서도 예수 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예수의 죽음은 가한 일이라고 외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했던 예수를 반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와 요셉의 경우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 음모에 대해서, 이 제사장들과 그리고 빌라도가 하고 있는 이 일에 대하여 니고데모와 요셉은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그 일은 가하지 않습니다." 가(可)하다 하지 않았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자고 지금 재판을 하고 절차를 밟아 가는 이 일은 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그렇게는 했지만 부(不)하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죽여서는 안됩니다' 하고 부(不)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멀찍이 쳐다보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느냐? 예수님을 죽이려고 끌고 가고 심문하고 그 절차를 밟아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 일은 부(不)합니다." 부(不)하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도모하는 이 일은 가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칼을 뽑아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을 막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정리해드린다면 가슴을 두드리고 떠나갔던 사람들은 "예수를 죽여야 마땅합니다. 죽이는 이는 가한 일입니다." 하면서 그 일에 참여까지 하였고, 두 번째 사람 아리마데 요셉은 "그 일은 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일은 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지만 부당한 일입니다 라고 외친 적도 없고, 부당한 일이라고 해서 말린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일을 부당하다고 외쳤고 그리고 칼을 뽑아가면서 막은 자였습니다.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본문이 소개하는 대로 "공회원이요, 부자요, 의로운 자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자라."라고 50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냐? 요한복음 3장 1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유대인의 선생이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선생이요 관원이면서 그리고 부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다 나라에 녹을 먹으며 그리고 큰 권세를 확보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정직하고 의롭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오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찾아가고 싶었으나 당당하게 낮에 찾아갈 수 없어서 밤에 찾아갔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 후에 예수님을 나쁘게 증거하고 거짓 증거하여 예수님을 어렵게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요한복음 7장 50절 이하에 보면 니고데모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뭐 그리 잘못한 것이 있느냐? 예수님의 행하는 일이 율법과 무슨 그리고 저촉이 되느냐?" 이렇게 어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주변 사람들이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의 제자냐? 당신도 그 한 당이냐?" 했을 때 니고데모는 '그렇소. 나는 예수의 제자요, 저 갈릴리 사람들과 한 당이요' 이렇게 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하게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실 그때 낮 정오부터 멀쩡하던 대낮에 태양이 빛을 잃고 밤에 달처럼 되어 있기를 3시간이나 되고, 성전 휘장이 둘로 갈라지고, 뿐만 아니라 무덤들이 열리고 죽었던 사람들이 앉아서 예수님 살아 나오기를 3일 동안 기다리고 있는 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때 가슴 두드리고 떠나가야 될 사람들은 분명히 떠나갔지만, 그 동안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의롭게 살아왔습니다. 드러내어놓고 믿는다고는 못했지만 그러나 이 일을 보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로운 자라" 이 주님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다음 그들은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아주 기회를 잘 잡고 큰 충성을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만나지 아니한 것은 평소에는 숨어 지내다가 마지막 기회를 한 번 잘 포착하고서 그 기회를 부여잡은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안 만나셨느냐? 제자들은 평소에도 주님을 따랐고 위기에도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을 만나셨느냐?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만을 만나신 것은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의 형편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는 평소에 주님을 드러내어놓고 따르지 못하고 지지하지 못한 것 그것 다 자기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함이고, 자기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부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면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저 농사하던 사람이요 고기 잡던 사람들이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과 함께 큰 능력을 행하며 오병이어를 먹게하며, 병든자를 살리며 큰 병자들을 일으켜 내니, 죽은자를 걸어나오게 하는 이 일을 주님과 더불어서 하게 되니 그들은 예수님을 평소에 따라다닌 일이 그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명예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큰 출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심문을 당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이 사람도 예수와 한당이 아니냐? 같이 잡아죽어야 될 대상이 아니냐?"라고 말했을 때 "아니오. 나는 저 예수를 알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의 입은 옷이 예수님의 그 무리들과 비슷한데도 "아니오. 이 옷은 그런 옷이 아닙니다." 하면서, 침을 뱉어가며 맹세해가면서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따랐던 것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마지막 이 순간에 되어지는 일을 보고도 멀찍이 서 있거나 부인하게 된 것도 자기가 다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속할까요? 이 성전 안에 들어와 있으니 처음부터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아리마데 사람 요셉과 같지 아니한 사람이 여기에 누가 있겠으며, 제자들과 당시의 모습이 같지 아니한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 것은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기회를 탔다하여 반대하고, 제자들이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다하여 만나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경우나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경우나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필요할 때에 다 예수님을 붙들었고 필요 없다 싶으면 예수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만을 만나신 것은 왜 만나셨느냐? 아니, 왜 만났는가를 생각 전에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찾으셨는가? 왜 제자들만 찾으셨는가? 아니,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올라가지 않고 계시면서 사람들을 만나셔야 했던가?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른 이유와 다른 목적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부활을 증거 할 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나를 살리게 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마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독생자를 살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도 이와 같이 죽으나 다시 산다는 복음을 전파할 대상자로 제자들을 택했기 때문에 제자들만을 만나게 된 줄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5절 이하에 보면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서 우리를 박대하오나 저도 하나님을 알 듯이 내게 달린 이 사람들도 다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도 알았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에 모든 되어진 일을 이 사람들은 다 알았습니다. 하오니 이 사람들을 상하지 않게 해 주소서. 나는 아버지께로 가오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이 사람들 인하여 기도하옵나니 이들이 나처럼 함께 죽지 않게 해 주시고 나의 사는 것까지 확인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기도한 후에 제자들을 물리치고 예수님이 그 죽음의 길로 가셨으니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주시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아직도 천당가지 못할까봐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를 바라서 사명과 명령을 주기 위해서 만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더 참고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 한번 조건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1절-23절을 읽어볼까 합니다. 신약성경 188페이지입니다. 가룟 유다가 창자가 나와서 죽게되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게 되자 이제 남은 열한 사도가 예수님이 평소에 항상 하시는 말씀이 열두 제자 필요하다 열두 제자 필요하다 했으므로 이 열두 제자 중에 하나가 빠짐으로 열 하나밖에 되지 아니하므로 하나를 더 채우고자하여 그 대상자를 찾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는가? 그 규격을 먼저 찾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다음에 제비 뽑아서 하나님이 세우는 자를 얻게 되는데 21절 이하를 살펴봅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저희가 두 사람을 천(薦)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그래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우게 되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야 될 사람들의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우리와 다니실 때 세례를 받고 올라오던 그날부터 시작해서 되어진 모든 일을 본 사람 아는 사람이라야 예수의 부활도 전할 것 아니냐 그것입니다. 그것이 기본 요소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는데 제자들을 만나신 이유는 무엇이냐? 아리마데 사람 요셉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만나게 아닙니다. 가(可)하다 부(不)하다한 이유 때문에 만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나타난 대로 3년 전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의 복음을 다 들었고 알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고 또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도 믿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데 사람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있었으므로 니고데모 역시 그런 자리에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형편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할 사람은 누가 되어야 하느냐? 성경을 다 아는 사람, 예수의 오심도 알고, 나심도 알고, 생활하심도 알고, 죽으심도 알고, 부활하심도 확인한 사람만이 예수의 복음을 전할 자로 주께서 뽑으셨으니 주께서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만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을 만나주셨던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도움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에 끌려서 측근을 불러들이고 내게 기분 맞지 아니한 사람은 멀리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 하나님의 나라 일을 아는 사람 그리고 믿는 사람 그리고 전하기를 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불렀기에 제자들이 그 대상이 된 줄로 믿으시고,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진리와 함께 부활의 소식과 함께 우리를 만나주고 있습니다. 우리 귀와 만나고 우리 마음과 만나고 우리 영혼과 만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만나고 계심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부활의 그 기쁜 소식과 능력을 우리와 함께 누리고 계심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경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요,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아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10차례나 만나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을 증거하라 하셨으니 오늘 살아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계신 여러분은 오늘 그때 그 주님께서 제자들만을 만나주셨던 그 만남의 만남을 만나고 계시니, 주님을 만나고 이 성전을 떠날 때 나는 주님의 일을 전하여야 될 사람이구나'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를 만나주시니 그처럼 충성했던 아리마데 사람 요셉도, 그처럼 목숨을 걸어놓고 향품을 발랐던 니고데모도 만나지 아니하면서 부활하신 주께서 오늘 우리를 만나시니 우리가 제자보다 나은게 무엇이며, 우리가 아리마데 사람 요셉보다 나은게 무엇이뇨? 그러나 그들을 다 천국으로 품으시고 그들에게 상급을 주시겠지만 오늘 우리를 별도로 만나 주시는 것은 나의 모든 일을 땅 끝까지 전하라."라고 명하시고 계신 것을 믿으시고 진정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자로서 오늘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만나고 계신 것으로 인정하셔서, 주님 오실 그때까지 주의 죽으심과 사심 증거하는 대상이 되셔서 만나주신 우리 주님을 오늘 서글프시지 않도록 만족하시도록 부활하신 주님께 우리의 전도할 각오를 다짐하여 보여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께 부활의 위력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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