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눅 23:39-43) [고난주간]
  • 2013.09.02 09:04:39
  • 어거스틴이 자기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천사가 그를 막았습니다. “너는 누구냐? 도대체 네가 누군데 이 거룩한 곳으로 함부로 들어가려고 하느냐?” 그러자 어거스틴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구요.” 그러자 천사가 어거스틴을 자세히 보더니만 “아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가슴에는 그리스도의 피와 그 말씀과 교훈으로 차 있지 아니하다. 윤리학자요, 철학자인 키케로의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렇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어거스틴은 통곡을 하면서 참회를 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철학적으로 생각했고, 나의 도덕성과 성경에 대한 지식과 선에 대한 열심을 가지면 구원 받는다고 막연하게 생각했구나! 정말로 내 가슴은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참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교회만 다니는 교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의 구원 받은 강도 이야기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흉악한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범죄자요, 더 나아가서 그는 한 평생 죄를 지어 왔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그 짧은 기간 신앙고백을 하고 바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충격적이요, 더 나아가서 그의 믿음이 도대체 어느 수준이고 그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하길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즉시 낙원을 허락 하셨느냐? 하는이러한  질문은 끝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린 십자가의 좌우로 두개의 십자가가 더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33절 말씀에도 그것이 나옵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두개의 십자가가 더 서 있는가 하면, 예수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만민 앞에 공표하기 위한 못된 의도로 두개의 십자가를 더 세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니까 마음이 찔리거든요. 그러나 그 양심을 누르고 별 수 없이 흉악한 강도와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일부러 두명의 강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처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부수적인 십자가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든 인간의 반응을 대변하는 것이 됩니다.

       이 사건 속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고 십자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두가지로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좌우로 해서 두개의 십자가가 있었듯이 인종이 많고 세상의 사람이 많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좌우로 해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두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했다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강도는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되었는가를 표현해 보면 이러합니다. 이 두 강도는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의 괴로움과 자기를 죽이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증오감에 불타서 처음에는 세상을 욕하고 모든 사람을 저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강도가 눈을 들어서 옆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십자가를 죄 없이 당당하게 지고 있고 죽어가면서까지 용서하는 그 위상과 거룩함을 보면서 과연 저분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로구나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의 마음이 열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인생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모든 죄를 그 한 마디 말로 속죄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그 한 마디 말이 귀한 것일까?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 죽음을 앞에 둔 혼미한 가운데 그의 고백은 그만큼 진실한 것입니다. 말짱한 정신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사람은 억지로 지어낸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가장 진실하고 심령 속에 감추었던 말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국방부의 초청을 받아서 일선부대를 시찰하고 왔는데 신우회장을 지내는 장교와 식사를 같이 하게 되어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이 바쁘고 고된 군대생활 속에서 부대 신우회장이란 직책을 받아서 봉사를 하시느냐고 했더니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믿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충 신앙생활을 했고 군대 와서도 군부대 교회가 자기 집과 가까운데도 한달에 한 두 번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전 어느날 매일 새벽기도가 5시면 드려졌는데 그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 새벽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의식할만큼 가까운 곳에 살았답니다. 그날 아침에는 종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있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웅성웅성 거려서 가 보았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그 교회의 군종병이 죽어 가고 있더랍니다. 연탄가스로 말입니다. 사람들이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와서 보니 찬송 소리도 안 들리고 교회 문은 닫혀 있고 깜깜하더란 말입니다. 죽어 가는 그를 보면서 이 곳은 깊은 산속인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며 걱정이 태산 같아 다른 생각은 못하고 있었답니다. 그 동안에 찬물을 뿌리고 주무르고 하는데 30분이 지나자 뻣뻣하게 죽어 있는 군종병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찬송가 434장 일절을 완전히 부르고 다시 엎어졌답니다.그때 비로소 아직 살아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들쳐 엎고 차를 몰아 병원 응급실에 갔답니다. 그리고 오면서 생각했답니다.

       저 군종병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저렇게 찬송할 수 있었을까? 너무도 부러웠답니다. ‘나는 정말로 엉터리로 믿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열심을 내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었습니다. 무의식 중에 한 말은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요즘은 잠꼬대 때문에 이혼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잘 자다가 자기 부인 보고 ‘미스 김!’ 이런 답니다. 낮에야 잘 속일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속마음이 어디 갑니까? 경황 없는 중에 그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강도의 모습을 살펴 봅시다. 고통을 받고 죽어 가면서 동료 강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원망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아파 죽겠다. 당신이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면 좀 좋겠느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원망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강도는 동료를 꾸짖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서 죽음 앞에 놓여있습니다만 그러나 정말로 무서운 것은 죽음도 아니고 십자가의 형벌도 아니고  하나님임을 인식합니다. 이 형벌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예표인 것입니다. 실제로 무서워 해야 할 분은 하나님인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려운 것이 많지만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영과 육을 아울러 멸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 해라.”

       시편 90편에 보면 모세가 고백하기를 “누가 여호와를 마땅히 두려워할만큼 두려워하였나이까?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이 백성이 패역해 졌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무서운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강도보다 못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씀을 식은 죽 먹듯이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무서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형벌이 당연한 것이라고 자기 죄를 인정합니다.

       지금 이 강도에게는 원망이 없습니다. 자기를 체포한 형사도, 못박은 군인들도, 자기를 나쁜 길로 들어가게 하고 배신한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이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까?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썩어버린 세상! 이 강도는 사회의 밑바닥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인간 치부의 적나라한 모습을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사람들, 그러나 위선자들 그 모습을 명백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만 죄인이냐. 나보다 더한 도둑들은 없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이 십자가의 형벌을 마땅하다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환경과 이웃과 그 무엇에 대하여 원망하는 자의 회개는 거짓입니다. 정말로 내가 죄인임을 알면 오늘의 현실은 마땅한 것입니다. “나는 억울해요,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전부 누구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강도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강도보다 낫다고 생각 하십니까? 마음 속으로 수없이 살인하고, 속이고, 교만하고, 교묘하게 위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십자가의 형벌을 로마정부가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형벌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예수의 행한 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고백합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여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 나는 예수만 붙듭니다. 내가 아무리 눈을 씻고 나를 살펴보아도 잘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죽어 마땅한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옵나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죄인인 나를 잊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 죄인을 꼭 기억해 주시옵소서. 오직 십자가만 붙들겠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 와서 나쁜 놈에게 복수하자는 세속적인 욕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만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나를 한 번만 생각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겸손하게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이 부르짓음에 대해 주님이 응답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연세대 의과 대학 김기복 교수님께서 강연하는 곳에 참석 했는데 강연을 마치시고 짧게 기도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주님께 내어 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조금이라도 예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극대화하여 보시고 저를 천국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기도를 듣고 많이 생각 했습니다. 이 기도가 소위 지성인들을 놓고 한 것인데 나 잘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기도입니다. 우리 같으면 잘난 사람들 앞에서 내가 그래도 연세대 교수요, 박사인데 하는 전제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미사여구를 섞어서 소위 신학자의 자기 자랑을 가지고 기도를 했을텐데 이 분은 깨끗하게 이 강도의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 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잘 보십시오.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를!.   옛날에 내가 어떻고 아는 사람이 많고 자식 자랑, 돈 자랑, 학벌 자랑, 자랑에 미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에 힘주는 모든 자랑거리는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교회를 백년 다녔고 귀한 직분 받아서 무수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랑이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 앞에 나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굉장한 자랑거리를 가리켜 배설물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랑을 위하여 살고 이러한 자랑을 떠벌이는 것을 삶의 재미로 아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많으면 하나님께 못갑니다.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달고 있는 인생의 계급장이 많지요. 이 모든 인생의 계급장!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때어 버려야 합니다. ‘나는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뼈저리게 가슴 깊이 고백하기까지 그는 예수를 바로 붙들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강도에게 배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강도같은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요, 우리도 강도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신앙고백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내가 강도와 다른 방법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강도의 겸손함을 잊어 버리면 안됩니다.

       ‘존 뉴턴’ 목사님은 천국에 가면 세가지 놀랄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 했습니다. “천국에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이 온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또한 반드시 천국에 와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와 보니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그리고 나같은 죄인, 노예 상인, 인간 쓰레기가 하늘나라에 와 있음을 보고 놀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죄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귀하기에 어떠한 죄도 사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언제 믿어야 될까요? 늙은 나이에도? 물론입니다! 지금 믿고 죽어도 구원받습니다. 강도를 보십시오. 다만 나의 죄인 됨을 알고 심판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천국을 사모하면 강도를 인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죄에 대하여 애통이 없고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까불고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교회를 훼방하고 전도의 문을 닫게 하는 사람은 그의 지위와 경력과는 상관없이 그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 합니다. 단 한 마디입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 내겐 의가 없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요, 지옥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십자가 보혈로 나를 사하시고 기억해 주옵소서. 이 절규 한 마디밖에는 구원받는 길이 없습니다.” 이 절규를 가지고 있는 자, 그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프리카에 간 어느 미국 선교사가 6년동안 전도를 했는데 한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내는 열병으로 죽었고, 외아들도 죽었습니다. 처자식 다 잃고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하여 선교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샌프란시스코항에 내리려고 하니까 기관원들이 다가와서 “내리지 마시오. 먼저 대통령이 내리신 뒤에 일반 승객은 내리십시오.” 그래서 대통령이 내리는 것을 보았답니다. 여름 휴가로 사냥터에 갔다 오시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들러 오시는데도 배에서부터 전용차까지 카펫이 깔리고 좌우에 군악대가 늘어서서 팡파레를 연주하고 환영 나온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대통령이 가셨고, 모였던 사람들도 다 가버린 다음에 쓸쓸한 항구에 혼자 내리게 되었습니다. 휴가 다녀오는 사람은 저렇게 환영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식과 아내를 잃고 실패하여 오는 자는 맞아 주는 사람이 없구나! 이러한 절망감에 가슴이 미어지는 데 갑자기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다. 네가 내게 오는 날 너를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으마. 카펫 대신에 황금길에서, 군악대 대신에 천군천사 찬송과 함께 너를 맞아 주마”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지만 이 선교사는 그 배를 다시 타고 아프리카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패자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의 죄를 알고 죄사함의 은총을 받아서 낙원에 이르는 행복한 죄인과, 죄를 거부하고 자랑하고 교만하여 지옥에 가는 불행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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