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21-28) [고난주간]
  • 2013.10.30 21:11:05
  • 오늘 우리는 뜻깊은 고난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봉독해 주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의 길에 들어서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대로 대답하였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하기도 합니다.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은 “그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 물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알고 싶어하신 중심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고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이와같은 신앙고백이 베드로 자신의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일개 무명의 시골 청년에 지나지 않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과 같이 성령의 감화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앞으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많은 고난을 받게 되고 결국은 죽음 당하실 것 그리고 제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옆에서 듣고 있던 베드로는 흥분해서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그러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절대로 주님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고 간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며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베드로는 사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간교한 꾀는 인간적인 생각과 행위의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수난을 예고하셨지만 죽음이 즐거울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신 예수님께 큰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유혹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가끔 이처럼 인간의 친절의 줄을 타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가는 이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유혹의 손길을 펴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기 앞에 부르십니다. “네가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선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고의 부르심이요, 가장 고귀한 직분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위대한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완성 단계에 올라선 것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약 260번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이외의 모든 크리스챤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거의가 예수 믿는 사람을 향하여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따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게 됩니다. 

    왜요? 우리는 주님이 불러주신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비롯한 것이라면 인간의 생각대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만 주(主)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서 제외될 때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지거나 순전한 쾌락주의에 치우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진리와 완성으로 끝나는 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지 그분을 만나려는 우리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 : 16).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만남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사람, 죄인, 버림받은 사람, 무능력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의 응답은 물론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제자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개인을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개인적이지 단체적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지식도 신앙 이론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능을 얻는 것도 주님의 가르치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을 따르려면 철저한 순종이 요구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는 스승과 제자 관계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오는 것 뿐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굴레를 쓴 노예”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이시요, 그의 제자들은 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도자요, 우리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의심이나 장애물에 부딪칠 때 기도로서 하나님께 아뢸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해가 되건 이해가 되지 않건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순종만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장래를 보장받고 계약서를 쓰고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주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까? 

    주님은 이 세상의 선생과 같이 “이 길은 옳은 길이고 저 길은 그른 길이니까 그른 길은 버리고 옳은 길로 가라”고 단순히 옳은 길만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먼저 앞서 가시면서 “내가 먼저 이 길을 가니,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니 네가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보통 지도자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선구자요, 개척자이십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 .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부인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이기주의적인 생활 태도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자기를 버리는 생활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사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일 가운데 천만에 가까운 서울 시민이 마시는 수원지에 수만 마리의 돼지 똥과 돼지우리 씻은 물을 5년씩이나 쏟아 버렸다는 믿지 못할 사건이 있습니다. 

    저는 이 보도를 듣고 울분을 금치 못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돈이 좋기로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시민이 돼지 똥물을 마셔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사실인지는 몰라도 이런 일을 한 집에서는 강원도에서 물을 가져다 마시고 일본 동경 긴쟈에서 매일 비행기로 빵을 날러다 잡숫고, 버터나 치즈는 구라파에서 가져다 드신다고 합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무슨 잔소리냐”고 말한다면 양심은 이미 마비된지 오랜 사람일 것입니다. 집에서 하수도 수리를 하나 해도 신고를 해야 하고, 조그만 집 한 채 짓고도 준공 검사를 철저히 하는 세상인데 5년씩이나 돼지 똥물이 수원지에 들어가도 당국에서 모르고 지냈다면 믿을 수 있습니까? 

    이 근래 대학가에서는 소위 어용 교수 축출 운동의 바람이 불어 심지어 어떤 대학에서는 휴교까지 하는 불행을 빚는 모양인데 저는 쫓겨나는 교수나 총장을 두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동안 대학에서는 각 교수에게 학생 몇 명씩 책임 지워 문제가 있을 때는 그 목을 자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돈 없고 권세 없는 대학교수, 총장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윗사람 눈치보랴 아래로 학생들 눈치보랴 그러면서 지내 왔습니다. 

    여러분의 학교를 정화시키는 데야 무슨 이의가 있겠습니까? 학교의 기물을 파괴하면서까지 아무 힘없는 학장, 총장을 몰아내야 한다면 차라리 이런 악덕 기업가, 이런 부패한 관리들을 쳐부셔야 합니다. 이런 악덕한 사람들이 이 땅에 건재하는 한 참다운 민주주의의 꽃은 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구현이 정치기구의 변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정신이 바로 서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들이 기업을 하고 그런 사람들과 결탁하는 괸리들이 있는 한 나라는 결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정말 이 나라가 바로 서려면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국민의 감시를 받으며 정치하고,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국민 앞에서 재산을 책임지고 살펴보며 사업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하셨으나 우리를 부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해 지셨습니다. 우리는 편한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셨습니다. 우리는 환영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에게 배척과 싫어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매를 맞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려는 우리를 향하여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과연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까?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2 . 주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가난입니까? 질병입니까? 생의 번뇌입니까? 육신의 가시입니까? 고생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죽음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자신을 버릴 뿐더러 자신을 죽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하였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장사되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가 한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도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매일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 무엇입니까? 매일 죽는 생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육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읍시다. 여러분, 죽으면 삽니다. 오늘 본문에 뭐랬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이하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도 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 배후에는 그 일을 위하여 희생한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희생없이 열매맺는 법이 없습니다. 

    3 . 주님을 따르는 것은 내가 따르는 것입니다. 

    따르는 것은 “같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엘리사가 그의 선생님 엘리야를 따를 때에 같이 갔습니다. 길갈에 가니 거기에 쫓아갔습니다. 베델에 가니 거기에도 같이 갔습니다. 여리고에도 같이 갔습니다. 요단을 건너도 같이 따라 건넜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가 승천할 때에 내어버린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가 받았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렇게 따랐습니다. 가버나움에도 따라 갔습니다. 나사렛에도 따라 갔습니다. 여리고에도 따라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따라 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도 골고다 언덕에도 따라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어떻습니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 하십니까? 

    그리고 따르는 것은 “함께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활, 예수님의 사상, 에수님의 성품 그의 모든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배워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던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배웠습니다. 

    더구나 따르는 것은 “함께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일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예수님의 하신 일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 가지 일을 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전도 사업이고 그 다음이 교육 사업이요, 그리고 셋째는 봉사 사업입니다. 

    이 사업은 오늘까지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계속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마는 전도하지 아니하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협력하지 아니하고 그냥 있으면 이런 사람은 말로만 따르는 사람이지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수가 많아서 큰 역사를 나타낸 것이 아닙니다. 학자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부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곳에는 세계가 뒤집혔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 가는 곳에는 큰 변화가 생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다른 사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오늘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려고 나설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하나 하나가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세상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만 온전히 따르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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