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 면류관 (마 27:20-31) [고난주간]
  • 2013.11.01 20:03:38
  • 오늘은 교회력대로 말하면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시다가 여리고로 오셨고, 여리고에서 다시 험한 산골짜기 길을 올라 거슬러 가서 케다지 마을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벳바게라고 하는 말음에 가시지 전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서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구하여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벳바게라고 하는 마을에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때는 바로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으로 다 넘으셔서 겟세마네 동산 기슭으로 내려가며 기드온 시내쯤 가시게 되셨을 때는 따르는 무리의 수가 훨씬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시온산 언덕으로 올라가시면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 가까이 나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함께 가던 여러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땅에 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어린 아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대대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지금도 해마다 종려 주일에는 벳바게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곳에서부터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감람산을 넘고 기드온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행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가 있는 곳, 예수님의 시체를 두었던 곳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풍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승리적인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시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이 왕을 통해서 이 세상의 혼란과 인간의 죄악된 문제를 해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데도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 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머리에는 금 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는데, 이것은 멸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는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는 하늘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지상에서는 왕이 되시는 분이신데, 이제 고통스러운 가시관을 쓰시고 거기에 안자 계십니다. 그는 마음과 육신에 상처를 입으시고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왕다운 얼굴은 쉴 새 없이 흐르는 피의 상처로 창백하고 기력 없이 이지러져 버립니다.

     이 시간 우리 심령의 눈으로 나 대신 가시 면류관 쓰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질고를 당하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이 사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죄 때문에 질고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 가시면류관은 그 머리를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고 아픔을 주었으며, 그 수치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마구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죄 때문에 질고를 당하시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 가시면류관은 그 머리를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고 아픔을 주었으며, 그 수치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가시면류관 쓰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1. 가시 면류관은 너무 슬픈 장면입니다.
     사랑과 인자가 풍성하신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냉대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생명의 왕이요, 영광의 왕이신데도 무지한 군병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이신데 소란을 피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멸시를 퍼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가 아니시나 우리 때문에 연약한 자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굴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하여 보좌를 버리시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자칭 왕이라고 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실한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었다면 그는 일개의 사기꾼으로 조롱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말씀이 그의 왕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의 주장이 거부되고 인격이 모독을 받게 될 때, 상처를 입고 비난을 받으며 멸시를 받는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모욕을 당하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가시 면류관은 조롱만이 아니라 고통을 더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만 했다면 짚으로 면류관을 씌웠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을 괴롭게 하려고 가시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저들은 주님에게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셨습니다. 게다가 머리마저 심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괴롭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피로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요? 주님은 온전히 우리 때문에 이런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도 이 고통스러운 정황을 그리라면 포기하고 물러섰을 것입니다. 천사장이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수욕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슬픔을 다 노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귀로 들을 것이 아니라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제 말을 주의해 들으시기보다 여러분의 사랑의 눈으로 앉으셔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 가시 면류관은 엄숙한 경고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무지한 로마 군병들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가시를 모아 가지고 가시면류관을 엮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인격과 교리에 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비합리적인 내용을 찾아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생각한 과학적인 발견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모순이 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에게 씌울 가시면류관을 엮느라고 손이 상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인류의 참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씌우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든지 가시면류관을 엮는 무용하고 사악한 일에서 손을 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노예를 해방하고, 압제받는 사람을 풀어 주십니다. 그의 복음은 자유의 현장이며, 폭군을 징벌하는 것이며, 제사장의 무익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친구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면 진주보다 더 값진 존경과 사랑의 금강석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몰라서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예수님에게 씌우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 남을 비평하고 트집잡는 일은 나쁜 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서 손을 떼시고 그런 일에 동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지한 군병들은 주님의 머리 위에 왕관의 씌웠지만, 저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주님의 손에 홀을 쥐어 주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의미하는 상아로 만든 홀이 아니라 갈대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닐 때 그것은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워드리고 그 손에 갈대 홀을 들려 드려 조롱하는 셈이 된 결과를 초래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하지 못하며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를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불 경건한 거짓 고백을 추궁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만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면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정직하게 면류관을 씌우지 마십시오. 명목상의 선심과 거짓된 존경심과 충성의 구실로 또다시 주님을 욕되게 할 필요가 무엇 있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다. 우리가 위선자는 아닙니까?

     지금 가시 면류관 쓰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슬픈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미움의 가시면류관을 씌워 드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는 순종한다고 자부했으나 실상은 불순종의 가시 면류관을 씌워드렸기 때문에 주님은 지금 가슴 아파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엄숙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3.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고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복당할 수가 없으며, 가장 큰 수치에서까지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고통을 당하실 때 회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의 대가는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셔야 할 공의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주님은 처음에 쓸개 탄 쓴 잔을 마시게 될 때 그의 입술을 갖다 대셨습니다. 그리고 한번 마시고 나니 잠시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영혼은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미친 사람같이 머리를 흔드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이러한 고통과 싸울 때 전력을 다하여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피곤해졌고 그의 몸은 피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통과 분노의 잔을 다 마셨습니다. 이 쓴 잔을 우리 주님께서 마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위하여 영원한 멸망을 없이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주님은 이런 모욕을 당하실 때 겁내지 아니하시고 정해진 그의 목적을 이탈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의 임무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담당할 수 없는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미워하는 고통도 참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나 주님이 당하신 조롱을 당한다면 그냥 있을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왕다운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인내의 모습은 무지한 몇몇 병사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도 짐작하시겠지만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가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다만 유일한 목격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말한 백부장인지도 모릅니다.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목격자에 의해서 전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이 내용이 무관심한 구경꾼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고초를 당하실 때 인내로 참으시고 견디신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저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한 인내는 인간 이상의 신비스러운 능력을 알게 하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가시면류관을 쓰신 주님이 우리의 구주요 왕이신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하기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역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할 때 불평과 복수심을 가지지 않고 참을 수 있다면, 가장 잔혹한 사람에게까지도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승리를 통해서 강퍅하던 사울이 바울 되게 영향을 미친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4. 가시 면류관은 치료의 도구입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통회의 눈물 없이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관으로 훌륭한 의사가 우리들을 치료해주는 그 신성한 치료제는 강하게 작용하여 주님의 일로 당하는 수치와 손해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견디는 데 큰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이 세상에선 가장 훌륭한 사람도 가장 악한 말을 듣습니다. 악한 세상은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왜요? 자기는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맛있는 과일이 새들에게 쪼이고, 가장 높은 산이 폭풍우에 가장 시달립니다.
     따라서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는 세상에서 많은 공격을 받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구원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여러분의 성의 있는 노력에 감사하기는커녕 여러분의 간섭을 싫어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저들은 여러분의 경고에 분노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힘이 들 때 가시 면류관 쓰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가시 면류관을 우리의 불만과 고민을 치료해 줍니다. 주께서 당하신 슬픔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예일 대학의 헬리 노운스 박사는 목회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wounded heaiers"라는 말을 썼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그 심령이 다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목사는 그 심령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란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목사 자신이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상처받은 치료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외국에 이민 가서 모이는 교회를 가보면 너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외국의 이민 생활은 고됩니다. 처음에 가서는 모두가 신비해 보여 흥분하지만, 얼마를 살아보면 거기에 어려움이 많고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초조, 언어가 잘 소통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마음, 억울한 일 당해도 풀 데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한국 사람끼리 모이는 교회에 나오면 이것이 터지는데 목회자는 이것을 다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은 또 목사에게 엉뚱하게 대해서 목사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생깁니다. 이때 가시면류관 쓰신 주님이 안 계시다면 이 고통은 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만이 아니고 한국도 그렇고, 지금만 아니라 옛날도 그랬습니다.

     전에 평양 어느 성문밖에 나가면 아주 큰 고목이 서 있는데, 그 나무의 속이 거의 썩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 골목을 지나가다가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니, 너는 목회도 안하는데 속은 왜 그렇게 썩었니?”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이 상처 치료받을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입니다. 가시면류관은 우리의 불평도, 근심도 , 허영도, 욕심도 다 치료해 줍니다. 이 가시관 잘 쓰면 마지막 우리 앞에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가시관 쓰신 주님 바라보면서 우리 몫에 태인 가시관 잘 쓰셔서 마지막에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다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0 ...

분류  제목  등록일 
고난주간 2021.12.22
고난주간 2021.12.22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11.05
고난주간 2013.11.01
고난주간 2013.10.30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09.02
고난주간 2013.09.0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