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개의 십자가(눅 23:39-43) [고난주간]
  • 2013.09.02 09:02:37
  • 골고다 언덕에 세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중앙에는 예수의 십자가, 양쪽에는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편이상) 왼쪽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는 흉악범입니다. 그는 공기밥 속의 돌과 같은 놈이어서 법은 그를 십자가 처형으로 걸러내 버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흉악범에게도 최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에 달려있을 너무 좋은 기회를 얻게된 것입니다. 
    사실, 왼쪽의 강도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된 것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좋은 교훈과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마지막 가는 길목이기는 해도, 인간 역사에 가장 위대했던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과거의 삶을 뉘우칠 수 있는 얼마나 좋은 챤스이며 구원받을 수 있는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총입니까? 
    그러나 왼쪽의 강도는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타인에 대한 조그마한 동정도 없었고, 말한마디 따뜻하게 해주어도 피차가 힘이 되어 죽어갈 수 있을텐데 끝까지 욕하다 일생을 마치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왼쪽의 강도에게서 내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모습, 매정한 모습, 가까운 사람들을 헐뜯는 나의 강도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해 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른쪽 편의 강도를 관찰해봅시다. 


    1. 오른쪽 강도는 로마법에 기준한 강도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은 페르사에서 기원됩니다. 페르사 사람들은 `올무즈'라는 신(神)을 섬겼습니다. 땅은 올무즈 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것입니다. 범죄인은 땅에 발을 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땅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범죄인들이 신성한 땅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높이 들어올리려 한데서 기인되고 있습니다. 
    로마가 페르사를 정복했을 때 이 잔인무도한 처형을 보게됩니다. 잔인성보다는 그 경고성, 엄포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죄수보다는 그 모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여차여차한 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죽이겠다라는 그 경고성 때문에 로마로 수입(?)하게 됩니다. 
    로마는 이 형벌을 반란자, 도주한 노예들, 가장 극악한 범죄자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이 형벌을 과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살인자? 사기죄? 폭행범? 흉악범들을 위한 형틀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로마정부에 반역하거나 저항한 죄입니다. 모든 죄에 관대한 로마인들이지만 반역죄에는 동정도 용서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한 처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해서 무조건 흉악범이다, 악랄하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잔인성을 정당화해주는 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보면 그보다 더 큰 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독신죄(瀆神罪)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황제에 대한 반역을 중죄로 여겼습니다. 여기 강도는 로마인들이 정해놓은 법률에 근거하여 달려있습니다. 두 강도가 비록 십자가에 달려있다 해도 로마인들의 눈에는 반역자요 도주자일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그는 애국자요 독립투사였는 지도 모릅니다. 오른쪽 강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흉악범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당시의 법률에 근거하여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범법자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범법할 수 있는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좋은 부모들을 만나고 좋은 환경에서 살면 범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없어지는 것이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범법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법자들을 바라보며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하나님의 은헤와 사랑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형틀에서 죄인의 개념에 새로운 인식을 해야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 로마인들의 눈에는 강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 죄인입니까? 살인하고 사기친 사람들!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등을 돌려도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설 때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들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그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불신(不信)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자가에는 소위 젊잖았던 사람들, 그럼에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불신자들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죄인 1호입니다. 억울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죄의 개념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잣대로 사람을 처단합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의 우리의 잣대로 십자가에서 모욕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범법자들을 보며 지나치게 비난하기 쉽습니다. 도둑질을 했다, 살인을 했다, 사기쳤다... 이런 죄목으로 체포, 투옥하기도 하고 처형하기도 합니다. 청문회에 불러 들여 온갖 모욕을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잣대는 법의 잣대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양심의 잣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법의 잣대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혼자 정의로운 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걸린다는 사실을 오른쪽의 십자가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2. 오른쪽 강도는 죄의 대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오른쪽 강도는 옆에 달려있는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마27:44).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우리들도 구원해 보아라! 그러면 믿겠노라!" 
    처음에는 오른쪽의 강도도 함께 따라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는 덩달아 따라하면서도 나름대로 판단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의깊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용서, 효도, 사랑,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고통을 감수하시는 모습, 독신(瀆神)이라는 죄명으로 달려있기는 해도 하나님을 향한 경건... 
    이 모든 것들 보면서 강도는 감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깊은 후회와 예수님에 대한 인정을 하게됩니다. 지금까지는 옆의 강도와 함께 욕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옆 강도의 조롱이 귀에 거슬렸고 마음 속에 의분을 일으켰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나? 그만하면 되었지?' 
    그는 참다못해 다른 강도를 꾸짖습니다. 41절,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이분은 왜 죽는가? 이 분은 참으로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 한마디는 오랫동안 그의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죄의 대열에서, 무정한 대열에서, 남에 대한 비난의 대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아직도 법의 십자가에는 달려있지만 죄악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른쪽 강도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뜻합니다.

    그는 이제 예수라는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당신이 천국에 올라갈 때 나를 동행시켜 주시오!" 
    감히 그런 구원을 요청하지는 못합니다. 
    천국이라면 자신처럼 살아온 사람이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 선한 삶을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생활이 있어야 하는 데 자신에게는 어두운 과거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달려 마땅하고 내세가 있다면 당연히 지옥감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니 그게 아닙니다. 사람이 죽게되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처럼, 죽음 앞에서 그는 예수님에게 매달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드리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34절,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지금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합니다"

    그 기도는 그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용서의 기도입니다. 빌라도조차 석방해주려고 했던 죄없는 사람, 그를 십자가에 매다는 아래의 사람들, 그들을 위해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들려올때 강도는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해 달라니?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저 예수라는 이는 정말 사람인가?' 
    로마에 반역했거나 중한 죄를 저질러 십자가에 달려있는 한쪽 강도, 그에게 용서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보복만 있고 폭력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용서를 하고 가는 사람을 만납니다. 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메시아일 것입니다. 
    그는 천국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와 함께 죽음의 길에 동행했으니 천국까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나를 생각하소서!"입니다. 그는 염치를 알았고 송그스러움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염치없는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뻔뻔하고 무정하고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해보지 않은 사람, 이제 그는 예수 앞에 굴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처분을 구합니다.

    누구나 죄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남에게 매정하고 남을 비난하고 함께 헐뜯고... 그러나 우리는 분별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섰다가도 바른 분별력으로 그 일이 내 양심의 청결을 흐리고 인격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라면 즉시 그 대열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로 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자기 식이 아니라고 꼭 한마디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멋모르고 따라하고 짝짝꿍해주지만 나중에라도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그 대열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기회가 있고 행복한 대열로 자리를 이동하게 됩니다.

    대심방 중입니다. 심방 받을 때 그 정성스러움에 오히려 감동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권찰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딸이 시집가서 아기를 가질 때가 되었는 데 애가 서지를 않더래요. 그래서 딸을 위해 기도하고 수요일날 교회에 나왔는 데 그 날이 바로 에베소서 강해 들어가는 날인데 산부인과 의사가 좋아하는 성경이 에베소서라는 농담적인 이야기를 듣고 아, 기도 응답받았구나 라는 확신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18일 후에 아이가 들어섰다는 통보를 들었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한 신앙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한 신앙을 좋아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도 은혜받을 줄 아는 그런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과 같은 대열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매사가 즐겁고 은헤가 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은혜 주시기를 즐겨하십니다. 바로 그런 대열에 서십시오. 
    매사에 부정적이고 남을 꼭 내려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도 함께는 하십시오마는 마음을 주지는 마십시오. 배웁니다. 감염됩니다. 교회 안에서 왼쪽의 강도 편에 서게됩니다. 모두를 위해서 불행한 일입니다. 
    혹시 자신을 돌아볼 때 왼쪽에 서 있거나 오른쪽에는 있으면서 동조하던 자리였다면 그 대열에서 빨리 떠나십시오. 고라의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도 족장 250명이 땅속에 생매장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에게 요청하십시오. "주님! 나를 생각해 주소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3. 오른쪽 강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오른쪽 강도, 무슨 짓을 저지르다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것도 모자라서 조금전까지만 해도 십자가 위에서조차 남을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을 알아봅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대열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과 한편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른쪽 강도의 태도가 변한 것은 단순히 그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의 인격에 감화받기에는 그의 교실은 너무 살벌합니다. 수업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무엇때문이었을까요? 
    그의 행동과 품행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동원되었을까요? 그들 부모들은 아들의 행위에 얼마나 애타했을까요? 그래도 고치지 못하고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장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그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아무런 사실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변화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독신죄로 매달았고 땅은 어둠 속에 갇히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습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창과 못자국에 찍혀 방울되어 떨어지는 그의 핏방울, 세미한 신음에도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 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 그들은 아래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도의 마음 속에 감화력, 회개의 영을 내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강도가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은헤입니다. 그 강력한 은혜가 덮쳤을 때 강도는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할 수 있었고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수업보다 강렬합니다. 하나님의 은헤를 받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고치고 다른 쪽으로 이동합니다. 오른쪽 강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자의(自意)로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왼쪽의 강도는 구원을 못받았고 오른쪽 강도는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행위는 비슷합니다. 그저 말한마디 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들의 구원의 유무(有無)가 결정된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구원이 일어났고 은혜가 없는 곳에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밀고 나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대도(大盜) 조세형을 변호해서 석방시킨 엄상익 변호사와 동석할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인즉슨, 조세형은 `성광'(聖光)이라는 작은 기독교 월간지 과월호를 읽다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다는 글을 읽고 나는 내 죄로 감옥 왔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저런 희생을 치루시는가, 라고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 속에 감동이 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천국과 구원은 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피로 용서받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말 한마디가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은혜를 쫓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도록 말이라도 좋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결 론 >

    고재봉씨의 이야기를 전도용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탄식처럼 그가 한 말은 이것입니다. 
    "아! 내가 일찍 예수를 알았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을!" 
    구원받은 강도에게서도 아쉬움은 많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물한잔 남에게 떠주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에게 피해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가 일찍 그의 그릇된 삶의 대열에서 빠져나왔더면 그는 이렇게 겨우 구원받는 생애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좀 더 아름다운 생애를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이동하십시오. 남을 욕하던 자리에서 남을 변호하는 자리로. 구원과 은총의 자리로.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기회입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은혜받을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그 행운아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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