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난주간 특새 시리즈 [고난주간 특새1]
  • 2020.04.06 14:54:07
  • [새벽기도회] 사모 시리즈 7편



    [월] 찬송:202장, 말씀을 사모하자 (암 8:11-13)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이 시간, "말씀을 사모하자"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에 장차 대 기근이 온다는 아모스의 예언입니다. 다름 아닌 말씀의 기근입니다. 말씀이 없어서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하신 말씀은 참으로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1. 구원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시107: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히스가야가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보시고 이사야를 보내어 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곤란에 처했을 때도 모세가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므로 살길이 생겼습니다.


    요5:25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에스골 골짜기 마른 뼈와 같을지라도 말씀을 들으면 살아나서 여호와의 군대가 됩니다.


    2. 말씀은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말씀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요,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존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십니까? 진정 하나님을 사모하신다면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3. 말씀 속에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1:1-3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러므로 형통하려면 성경을 늘 읽고 그 말씀을 내 말씀으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는 말씀마다 다 내 복이 됩니다.


    축복의 말씀을 붙잡으면 복이 옵니다. 능력의 말씀을 붙잡으면 능력이 옵니다. 건강의 복음을 붙들면 건강이 옵니다. 지혜가 옵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구하라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4. 말씀은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호14:2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즉 말씀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먼저냐? 기도가 먼저냐? 말씀이 먼저냐? 찬송이 먼저냐? 상당히 규명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그래도 말씀이 먼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말씀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열심히 묵상하면 기도도 나오고 찬송도 나오고 회개도 나오고 믿음도 생기고 지식도 생기고 봉사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보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최고의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이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 침묵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십시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그 안에서 구원과 복과 형통과 온전한 믿음을 갖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화] 찬송:457장,  믿음을 사모하자 (벧후 1:1-2)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오늘은 “믿음을 사모하자” 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믿음을 가리켜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벧전1:7에서도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믿음이 보배인 것은?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건 불신자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과 증거를 구했는데 그것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아니까 말씀이 없이도 증거 없이도 매사에 믿으십시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막4:25에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셨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걸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받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 성경에 32,500개의 약속이 주어져 있어도 믿음 없이는 하나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은사가 큰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3. 믿음으로 세상도 지옥도 마귀도 죽음도 다 이기기 때문입니다.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은사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것이 믿음의 은사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것도 믿음의 은사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도 믿음입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4. 믿음은 클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마15:28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믿음이란 클수록 좋습니다. 큰 믿음을 가져야 큰 사람입니다. 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큰 믿음을 보실 때마다 아낌없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새벽에 믿음을 사모하십시다. 얼마나 귀한 것이면 보배로운 믿음이라 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약속하신 것을 누리며 세상을 이기고 크게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수] 찬송:91장, 예수님을 사모하자 (고후 4:7-1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예수님을 사모하자”입니다. 본문의 나오는 이 보배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보배이십니다. 만국의 보배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보배일까요?


    1. 예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됩니다. 보물덩어리 중의 보물입니다.


    2. 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십니다.


    요14:14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기도하는 것처럼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기도하세요. 그리고 그 확신을 마음에 꼭 간직하세요. 그러면 다 들어주십니다.


    3. 또 예수 이름으로 하면 하늘에 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했다. 그러면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4. 또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그대로 됩니다.


    마21:21-22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4. 그리고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 생명과 인격과 삶에 나타나면 그것은 완전이고 온전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과 행복을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우주에 예수님처럼 보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 이름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고, 기도응답을 받으며, 하늘의 상을 받고, 응답과 평안과 담대와 인격과 생명과 크신 영광이 여러분에게 온전히 나타나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목] 찬송:197장, 성령을 사모하자 (눅 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시간에는 “성령을 사모하자.”입니다. 13절의 좋은 것이란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보배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까?


    1.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롬5:5을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행복을 모른다면 아직 성령 충만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16:14에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역사해야 예수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공로를 적용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고 승천하여 영광스럽게 된 그 공로를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3.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요14:16-17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 “도움을 주시기 위해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상담자가 되시고 위로자가 되시고 돕는 자가 되십니다.


    4. 예수님 같이 큰일을 하게 하십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은 그 뒤에 나오듯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더 큰 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5. 성령 받아야 천국 갈 준비가 됩니다.


    그래야 아무 두려움이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이 외에도 성령의 9가지 은사나, 열매도 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도 해방도 시켜 주시고,,, 성령의 보배 되심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받는 방법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충만하기 위해서 날마다 예배로서 기도로서 찬양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금] 찬송:314장,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자 (고전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시간에는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자”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은 희생하고 수고하고 주는 손해 보는 것인데 왜 사랑이 보배일까요?


    1.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온전히 함께 하시고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7-8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셨습니다.


    2. 또 사랑할 때 믿음이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엡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고전13:11에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사랑할 때 영적 어른이 되기 때문입니다.


    3. 또 사랑할 때 은사도 완벽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고전13:12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4. 또 사랑할 때 두려움도 사라진답니다.


    요일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은 두려움도 심판도 이기는 능력입니다.


    5. 또 사랑할 때 율법이 온전히 지켜집니다.


    롬13:9-10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하면 율법도 다 지킨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랑의 유익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유일하게 만나주신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온전한 믿음과 은혜와 은사와 축복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토] 찬송:210장, 교회를 사모하자 (시 84:1-4)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 시간에는 “교회를 사모하자”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시 84편은 시편기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장막을 사모한 애절한 찬송시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여호와의 성전을 그렇게 사랑할까요? 교회가 구약과 동일한 성전은 아니지만 예배하고 신령한 제단을 쌓는다는 점에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모해야 할 이유는?


    1. 교회는 어머니와 같기 때문입니다.


    갈4:26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도 없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예수 믿고 거듭나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2. 교회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파송되어 있는 곳입니다.


    11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런 일군들은 교회 말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3. 교회는 세상의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롯과 그의 두 딸이 그 부근의 소알성에 피했는데 소알이 바로 교회의 상징입니다. 세상에 속했지만 세상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예배의 처소입니다.


    4.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고, 하나님께서 예배와 성례와 말씀과 찬송과 기도를 통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예배를 많이 드려 영적에너지가 충전된 곳이라 예배당에 들어오기만 해도 아버지 집의 집에 온 것처럼 그렇게 평안하고 아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도하기 좋은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4. 또 교회는 성도들과의 영적 교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서로 은혜가 흐르고 도움이 됩니다.


    5. 그리고 교회에 진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없다면 어떻게 말씀이 보존되고 전파되고 해석되겠습니까? 그래서 딤전3:15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교회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교회 떠나면 죽습니다. 교회 떠나면 100% 불신자 됩니다. 교회를 핍박하면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귀히 여기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 찬송:180장,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자 (계 22:20-21)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은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외쳤습니다. 천사의 외침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할까요?


    1. 사모하는 자에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계22:20에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여기 “속히”는 헬라어로 ‘타퀴’라는 부사로서 신비하게도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장차 재림 때만이 아니고 그를 믿고 사모하는 자에게 이 순간에도 생명으로 능력으로 기적으로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복음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고 기도하는 곳에 지금도 부흥의 영으로 임하고 계십니다.


    2. 우리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요일3: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사모하면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장차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변화가 됩니다.


    3. 의의 면류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딤후4:8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처럼 주의 나타나심만 사모해도 의가 왕 노릇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모습이 갖추어집니다.


    4. 악을 심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4:1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날이요 재림의 날이기도 합니다. 초림으로 우리 속의 악이 심판 받아 제거하셨고 다시 오심으로 세상이 변화됩니다. 온갖 사탄의 시험들은 주님을 멀리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벧후3:12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이 말씀처럼 장차 지구와 우주가 변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이 임하시면 악을 제거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셨고 사모하는 자에게 지금도 임하고 계시고 또 온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임하시든지 재림으로 임하시든지 우리 주님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셔서 우리 주님께 가장 큰 사랑 받고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회 팔복시리즈]



    찬송가 427장 / 천국의 복을 받읍시다 (마 5:1-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지난 주에는 "사모하십시다."라는 사모시리즈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복을 받읍시다."라는 8복시리즈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는 첫 번째 복으로 “천국의 복을 받읍시다.”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은 내세천국과 마음의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갈 내세천국도 중요하지만 지금 성령 안에서 현세에서 누리는 현세천국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의 천국 없이 내세천국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마카리오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을 원문으로 보면 “마카리오스”인데 이 용어는 그냥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보통 복이 아닙니다. 내가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주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천국의 복을 주실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을 누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세상 염려 근심 미움 욕심 탐심 영광 비교 등 세상에 얽힌 마음으로 차 있다면 그 마음은 불행만 있을 뿐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푸토코스"


    그래서 여기 '가난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푸토코스'는 구걸해서 먹어야 하는 거지와 같은 가난을 의미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없어야 우리를 택하여 주신 것만 생각해도 기쁨이 넘칩니다. 그렇지 않고 무슨 비교의식이나 욕심이 있다면 기쁨도 감사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어머니가 전부이듯 하나님이 나의 전부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그 마음에 예수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반면 딤전6:6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했습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이 시간, 마음의 천국을 위해서 더 버리십시다. 더 낮아집시다. 더 겸손해집시다. 더 감사하십시다. 더 회개하십시다. 더 주님을 본받으십시다. 무슨 욕심이 있습니까? 무슨 불만이 있습니까? 무슨 원한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 다 버리고 더 낮은 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으로 나의 구주 삼고 하나님으로 나의 기쁨 삼고 열심히 섬겨서 하나님 나라의 복으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63장 / 위로의 복을 받읍시다 (마 5:1-4)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두려운 상처



    오늘은 두 번째 복 “위로의 복을 받읍시다” 위로함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위로란 그 마음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상처는 그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상처란 마음의 아픔과 아울러 큰 죄악이기도 합니다. 미움 원망 좌절 슬픔 원한 저주 완악함 강퍅함 마음의 살인과 복수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악의 쓴 뿌리가 바로 마음의 상처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처가 치유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12:14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화평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사탄이 그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치유는 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고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하시며 쓰다듬어 주시고 격려해주실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만사형통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위로의 하나님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1:3-4에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했습니다.

    "펜테인"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애통이 아닙니다. 여기 “애통”은 헬라어로 ‘펜테인’인데 그 의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영적인 슬픔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 아픔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서 내어놓는 것입니다.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펜테인’입니다.

    깊은 기도

    마음에 쌓으면 병이 됩니다. 그 상처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습니다. 만사불통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그대로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쏟아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아뢰고 일러바치세요. 하나님 앞에 내놓고 우시기 바랍니다.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이 더 놀라운 치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더 깊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위로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한나가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쏟아놓았듯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앞에 더 깊은 기도를 드리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35장 / 기업의 복을 받읍시다 (마 5:1-5)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기업의 복을 받읍시다.”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상당히 난해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적이고 비유성이 짙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의 원문은 ‘프라우스’인데 그 뜻은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 많은” 등의 의미로서 자기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훈련된 인격의 요소를 가리킵니다.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킬 때, 사자나 이리 같은 것들을 훈련시킬 때 잘 훈련이 되면 주인이 “프라우스”해졌다고 말합니다. 고전 13장에 사랑은 온유하다 했습니다. 모난 것이 없이 사랑으로 잘 다듬어진 원숙한 인격입니다.


    그럼 온유한 자가 누릴 기업인 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듯 가나안이 천국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예수 믿으면 갈 수 있지만 이 땅에서 그 풍성한 복을 기업으로 누리려면 내가 죽어지고 사랑으로 온유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셨습니다.



    다음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4종류의 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셨는데 즉 마음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으로 마음을 얻어 세계를 복음화할 수 있습니다. 전도의 비밀이요 부흥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자리입니다. 예수님도 온유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 하셨고, 마12:19에는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만약 그 핍박을 못 이기셨다면 구원사역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온유했습니다. 민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고, 딤후2:24-25에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아무리 능력 있어도 다듬어져 있지 못하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온유란 그만큼 이 연단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더 믿고 더 죽어지고 더 순종하고 더 충성하고 더 온유하고 더 사랑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누리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고 이 땅에서도 성공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35장 / 의인의 복을 받읍시다 (마 5:1-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오늘은 “의인의 복을 받읍시다”입니다. 성경에 의인에게 주는 복의 약속이 많습니다. 시1:6에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시5:12에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시34:15에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37:25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등등 그 복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복음을 알면서도 의롭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악하고 우리 또한 악하여 그 진리에 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롭게 사는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라는 말씀입니다. 의를 강력하게 사모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보혈의 의를 강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원어로 ‘디카이오쉬네’인데 이 의는 인간의 의가 아닙니다. 이 의는 복음의 의를 가리킵니다. 이 의는 덮어주시는 의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법궤의 덮개를 속죄소했습니다.

    이 덮어주시는 사랑을 담대히 믿으세요. 그래야 사탄의 참소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4:16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했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을 처리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믿으면 옛사람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했습니다. 이 옛생명의 뜻을 절대 들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계12:11에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이는 의를 사모하는 자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본래는 선했지만 주를 위해 살려는 마음이 느슨해져서 미혹에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승리자여도 의를 위한 갈망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엎드림이나 그 승리의 복음에 서려고 하지 않기에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롬12:2에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태도가 아니면 의를 내 것 삼을 수 없음을 깊이 기억하십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강하고 담대하게 보혈공로 믿고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신앙생활하여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의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18장 / 긍휼의 복을 받읍시다 (마 5:7)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긍휼의 복을 받읍시다”라는 제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은데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받으려면 긍휼은 필수입니다. 이것은 큰 사랑 받은 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긍휼은 심판도 이긴다고 했습니다. 약2:13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했습니다. 긍휼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심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긍휼이 무엇일까요?



    긍휼이란 ‘엘레오스’로서 ‘자비’를 뜻하는 말로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조롱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용서와 동정, 용서와 사랑이 긍휼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그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하나님 앞에 긍휼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6:14-15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의 비유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또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드리는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는 매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요일3:17-18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살고 싶다면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부터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위대한 성도들이 이웃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큰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긍휼히 여겨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크게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74장 / 임재의 복을 받읍시다 (마 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오늘은 “임재의 복을 받읍시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보고 싶습니까? 그런데 여기 본다는 것은 체험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는 체험을 임재의식이라고 합니다. 임재의식은 우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만큼 행복한 경험입니다. 에녹은 이 임재의식 속에서 평생을 살았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 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을 청결하라.

    그래서 히12:14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고, 행2:38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했습니다.

    사57:15에는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지만 함께 하신 체험이 없다면

    이 시간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의 단비가 내릴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면 변화된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삼1:11에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회개하면

    사58:8-11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하시면서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57장 /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어지는 복을 받읍시다 (마 5:9)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어지는 복을 받자”는 제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외쳤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대 승리를 보여주는 귀한 사건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지만 아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앞에 자녀로서의 영광을 나타내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어진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전도의 문을 여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까요?


    화평을 위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원수들이 그토록 핍박하고 미워해도 누구하나 미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제물이 되어주시고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그 믿음 가지고 병인을 안수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면서 시험했던 것도 그런 자의식이 있었다는 힌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화평케 해야 한다고 아무데나 원수는 변하지 않았는데 야곱과 에서 이야기 들이대며 안보를 해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느헤미야는 한 손엔 창칼을 한 손엔 망치를 들고 예루살렘 성을 건축했습니다. 오히여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안녕과 평화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도 믿음 가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막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둘이 되고 지진이 일어나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죽은 성도들의 몸이 많이 부활하고 얼마나 놀라웠으면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외쳤을까요?



    맺는 말씀



    그러므로 하나님 자녀답게 다투지 말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늘 기도하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타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불안과 공포에 떨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 평안해지고, 우리의 기도로 잠이 오고, 우리의 축복으로 만사형통하여 사람들에게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336장 / 하늘의 큰 상을 받읍시다. (마 5:9)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은 8복의 마지막으로 “큰 상의 복을 받읍시다”라는 제목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다가 받는 박해를 말합니다. 그래서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가장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고, 초대교회를 박해했던 가장 큰 박해자 역시 로마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을 어디까지 따라다니며 사역을 방해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10:18-19) 하셨습니다.


    현대적으로 바꾸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많이 보편화됐지만 성령을 강조하면 이단으로까지 몰았습니다. 사역의 대상도 만만치 않아 온유와 사랑과 인내와 충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 보세요.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기에 그랬겠지만 한 편으로는 그가 핍박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으면 마음에 천국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 박해 받는 것을 두려워 말고 주님이 남기신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큰 상을 생각하며 스데반처럼 해와 같이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그동안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한 가지라도 굳게 붙잡고 실천함으로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팔복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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