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마가복음 15:33-47/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고난주간 특새1]
  • 2013.03.29 21:42:12
  •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애정이란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지만 펠리칸이라는 새는 유별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새는 먹이가 궁하여 새끼를 돌보기 어려워지면 자신의 가슴의 털을 뜯고 살을 찢어 새끼를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끼가 병약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어미는 자신의 가슴살을 찢는 정도가 아니라 핏줄을 끊어 흐르는 피를 새끼의 입에 넣어 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새끼를 살리고 자신은 기꺼이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본능적인 모성애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위대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정말 대단한 새끼 사랑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성애가 물고기인 가시고기의 자기희생에서도 보여 집니다. 이런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데 하나님의 인간사랑은 이런 동물의 사랑 이상의 놀라운 사랑이요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측량할 수 없는 정말 놀라운 사랑이요, 감격의 사랑이요, 가슴 벅찬 사랑이요 눈물이 쏟아지는 사랑입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이 한번은 북극 근방 바다의 깊이를 재려고 동아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해저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동아줄보다 더 깊음" 이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더 긴 줄을 가져다가 깊이를 재 보았으나 역시 해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같은 작업을 며칠 계속하였지만 북극의 깊은 바다의 깊이를 잴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난센은 그의 일기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 근방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 같다. 끝없이 깊은 바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인간의 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소견이 좁고 짧으며 인간의 이해가 부족하여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월이 가고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도 한없이 깊어짐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에서 견디기 어려워 절규하신 말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요 힘들었기에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의 기도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은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갗이 찢어 졌고 가시관을 쓰신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육중한 십자가 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가는 길을 감당하지 못하여 주님께서는 여러 번 쓰러지시기를 계속한 후 골고다에 이르러 무자비한 병사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인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극형이었습니다. 캔서스대학 해부학 교수 매츠키박사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온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피부와 살이 찢겨 많은 피가 흐르고 통증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가져온다.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공급이 안 된다. 그래서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는 몸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하는데 이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된다." 이런 형편에서 예수님은 견딜 수 없어 크게 소리 지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죽어야 하는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신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아버지께로 버림받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아들 예수님은 그렇게 절규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이란 좀 더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엉엉 우시면서 부르짖고 구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짖음에서는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 철저히 벌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아들을 버리시는 아버지, 그렇게 절규하며 찾았는데도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깊고 높으신 사랑의 의미를 결코 우리 작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벅찬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지는 부모의 사랑은 크고 위대하지만 인류를 위하여 자식을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무튼 놀라운 사랑일 뿐입니다. 이 사랑이 헛되지 않아 하나님은 우리들을 자녀로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아픈 사랑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더욱 더 신앙에 매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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